역사

일본 최고의 검객 미야모도 무사시(宮本武藏)

태권 한 2011. 9. 15. 08:56

일본 최고의 검객 미야모도 무사시(宮本武藏)


1. 아버지 미야모도 무니사이

일본 최고의 검객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닌 미야모도 무사시의 아버지는 미야모도 무니사이(宮本無二齋)란 사람이다.
조부인 히라다 쇼강(平田將監)은 검과 십수술(十手術:포졸 등이 휴대하고 다니는 갈고리가 달려 있는 쇠막대)의 명수로서, 다케야마(竹山) 성주인 신멩 이가노가미(新免伊賀守)를 섬겼는데, 그 성주로부터 신멩이라는 성을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 쇼강의 아들(일설에는 손자)이 바로 무니사이인데, 아버지에 더 하지도, 덜 하지도 않는 용맹스런 무사였다고 한다. 역시 검과 십수술의 달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무니사이는 같은 군내의 미야모도촌으로 이주하였으며, 그곳에서 난 아들이 미야모도 무사시이다.
그후 관직에서 물러나 낭인이 되어 교토로 올라왔다.

당시 교토에서는 요시오카 나오마사(直賢)가 [후구와(扶桑) 제일의 검법자]로 불리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장군인 요시아키가 검의 달인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신멩 무니사이에게 요시오카와 승부를 겨루어보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단 삼판까지라는 조건을 붙였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서로 맞서 겨루었는데, 첫판은 겐보가 이겼으나, 나머지 두판은 무니사이가 이기고 말았다.
그래서 장군 요시아키는 무니사이의 검술을 칭찬하여 [일하무쌍 병술자(日下無雙 兵術者)]라는 호를 수여하였고, 무니사이도 [일하개산 천하무쌍(日下開山 天下無雙)]이라고 일컬으며 다녔다고 한다.
무니사이는 검을 주로 사용했고, 가끔 십수술를 사용했다. 요시오카 겐보와의 시합에서는 평상시처럼 목검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 무니사이가 미야모도 무사시의 아버지였을까. 이러한 의문은 미야모도 무사시가 일본 대중들 사이에 최고의 인기 검객으로 부상되면서 줄곧 뒤따르는 문제였다.
미야모도 무사시의 전기에 관하여는 결정적인 것이 없다. {오륜서}도 무사시의 생애에 대해서 충분하게 쓰여져 있지 않다. 확실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사항도 기재되어 있지 않는 것이 있다.
{이천기}, {단치봉균필기(丹治峰均筆記)}, {격검총담(擊劍叢談)} 등이 무사시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지만, 어느 것이든 무사시 사후 100년쯤 지나서 쓰여진 것이다.

 

2. 열세 살 때 첫 대결을 벌이다

1596년이라면, 그 2년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천하풍운이 다시금 흔들리기 시작하지만, 어쨌든 이때는 난세의 어지러움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시기였다.
한슈(播州)의 어느 한 길가에 대나무 바자울을 둘러치고 현판을 내건 무사가 있었다. 현판에는,

―가시마 출신 아리마 기헤이(有島喜兵衛). 신당류로서,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을 것으로 자부한다. 자신 있는 자는 나와서 한판 겨루어보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마침 한 소년이 검술수련을 마치고 장비를 어깨에 둘러멘 채 그 앞을 지나다가 그 현판을 보았다.
바자울 안에는 한 무사가 걸상에 걸터 앉아서 목도를 감아쥐고 사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수군거리기만 할 뿐,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서 도전하는 사람이 없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소년은 천성적인 투지력을 억제치 못했다.
"제기랄, 아무도 없군. 어른들 주제에 모두 겁장이 뿐이야."
커다란 목소리로 조롱하였다.
기헤이가 보니 어린 소년이었으므로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래도 소년이 계속 떠들어대자 마침내 기헤이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이 자식이 애라고 해도 제 분수를 모르고 떠들어대는 걸 보니, 검술에 자신이 있는가 보구나. 어디 나와 한판 겨루어보자."
이렇게 으름장을 놓으면 입을 다물고 기세가 꺾일 것으로 믿었는데, 소년은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이,
"좋소. 집에 가서 준비해가지고 오지요."
그리고는 쏜살같이 집을 향해 뛰어갔다.
집으로 달려들어온 소년은 숙부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애야, 어른을 함부로 놀리는 게 아니다."
숙부는 소년을 나무라곤, 곧 기헤이를 찾아가 사과했다.
"우리집 아이가 너무 철이 없어 저도 매우 속을 태우고 있습니다. 이번 일은 잘못되었으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때 마침 소년이 막대기를 손에 들고 싸울 태세를 갖춘 채 달려왔다.
"자, 약속대로 붙어보자."
숙부는 놀랐다. 구경꾼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기헤이는 화가 머리 끝까지 솟았다.
"더이상 용서할 수 없다."
기헤이는 걸상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화가 난 김에 들고 있던 목검으로 소년을 냅다 후려쳤다.
순간 소년은 번개처럼 몸을 피해 빠지면서 기헤이를 온몸으로 부딪쳤다. 어린애라 깔보고 제대로 자세를 갖추지도 않고 있던 기헤이는 허를 찔려 뒤로 나가자빠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소년은 달려들어 막대기로 마구 기헤이를 두드려대었다.
숙부가 놀라서 말리며 탄식했다.
"정말 앞날이 걱정되는 놈이군."
이것이 후일 검성(劍聖)이라 존경받게 되는 미야모도 무사시의 열세 살 때의 모습이었다.

 

3. 요시오카 일문과의 대결

{이천기(二天記)}를 비롯하여 미야모도 무사시 문하생이나 후대인들이 저술한 책에는 무사시의 행적을 미화한 나머지 여러가지 모순들이 많이 나타나서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무사시가 결투하여 승리했다는 장면도 그 태반은 허구적 구상인 것으로 보여진다. 단지 칼솜씨만 빼어나다고 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자기 선전이나 이름을 널리 알리는 재간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전국을 돌아다닌 무사시는 물론 검술로서 성공하려고 무척이나 노력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13세에 신당류의 아리마 기헤이를 이긴 이래 16세에 아키야마에게 승리하고, 21세에 교토에 올라가서 몇 차례 시합을 하여 승리한 다음, 28,9세 때까지 60여 차례의 결투에서 한번도 지지 않는다.
30세 이후에는 다른 유파와의 시합도 삼가고, 오로지 검법 이론을 확립하는데 경주했다.
50세 경 바야흐로 검법의 참뜻을 깨닫고 그것을 정리하여 여러 가지 무예를 스스로 깨쳤다. 그리하여 자신의 병법을 이천일류(二天一流)라 칭하였다.
노년에 이르러 구마모도 번주의 식객이 되기까지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하고 여러 곳을 방황하며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무사시의 검술은 야규 무네노리의 기량을 훨씬 능가할 것이라고 한다. 더욱이 그는 시가(詩歌), 다도(茶道) 등 여러 분야에서 뛰어났다.
하지만 일생동안 목욕도 하지 않고, 맨발로 외출했다가 귀가하면 발을 걸레에다 닦을 뿐이며, 일년 내내 더러운 의복을 걸친 채 지냈으므로 신분이 높은 무사는 그와의 교제를 피했다.
무예자에게 종종 있는 기행, 기벽의 성격을 무사시도 지니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검의 기술은 확실히 뛰어났으나 태평성대를 맞은 에도에서는 임관의 길이 막혀 어쩔 수 없었던 무사시였을 것이다.
그가 만년에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독행도 십구조(獨行道十九條)}에는,

一. 세상 도리에 어긋나지 마라.
一. 한평생 욕심내지 마라.

등이 적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노년에 접어들어 자신을 꾸민 말일 것이다.
젊었을 적 무사시는 싸움에서 계략을 썼을 것이요, 입신의 욕망도 컸으리라 여겨진다.

미야모도 무사시가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1604년(慶長 9년) 봄, 21세 때에 교토에서 요시오카 일족을 무찌른 것에서 비롯되었다.
먼저 [후구와(扶桑) 제일의 병법가]라고 불리우는 요시오카류의 당주 요시오카 기요주로(淸十郞)와 교토 근교에 있는 렌다이 들판에서 승패를 겨루어 목도로써 상대를 혼절시켰으나, 사전 약속대로 목숨만은 끊지 않았다.
요시오카 문하생들에 의해 문짝에 실려 돌아온 기요주로는 그후 회복하기는 하였으나 칼을 버리고 삭발, 출가하고 말았다.
다음으로 기요주로의 동생 요시오카 덴시치로가 역시 교외에서 무사시에게 도전했다. 허나 그는 무사시에게 목도를 빼앗기고 그것으로 맞아 쓰러져 절명하고 말았다.
정정당당한 결투로서는 도저히 무사시를 이길 수 없었으므로 요시오카의 문하생들은 수백 명이 활, 창 등으로 무장하여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무사시는 사전에 눈치채고 상처를 입지 않은 자가 거의 없을 정도로 철저히 격퇴시켰으며, 기요주로의 아들 마다시치로마저 베었다. 이것이 세상에 유명한 [일승사(一乘寺) 솔밭의 결투]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로마치 장군가의 병법 사범을 해오던 명문 요시오카 일문은 무사시로 인해 철저히 괴멸되어 그 유파마저 끊기게 되었다, 고 {이천기}는 언급하고 있다.

한편 [요시오카 전]의 기술은 대조적이다.
그 책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나 오류가 있어서 사료로서 믿기 어려우나, 요시오카 가문의 역사에 관하여는 매우 정확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요시오카 전]에는 아사야마 산도쿠(朝山三德), 가시마 린사이와 더불어 미야모도 무사시가 등장한다.
그 책에 의하면, 마쓰다이라 성주가,
"자네와 요시오카 일족과 대결하면 어느 편이 이기겠는가?"
하고 물었을 때 무사시는,
"만일 요시오카 형제가 함께 덤벼도 도저히 저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하고 자신에 넘친 대답을 하였다.
당시 교토 시내에 도장을 내고 있던 요시오카 류는 당주 나오쓰나와 동생 나오시게의 시대였다.
마쓰다이라 성주는 즉시 교토의 관리에게 사람을 보내 요시오카 형제와 미야모도 무사시와의 시합을 성사시키라고 요청했다.
나오쓰나, 나오시게 형제를 자신의 관사로 초청한 관리는,
"미야모도 무사시라는 자가 자네들과 승패를 가리자고 하는데, 지체없이 그 요구에 응하라."
고 명령했다.
물론 요시오카 형제는 그 명령에 따랐다.
시합 당일, 먼저 형인 나오쓰나가 무사시와 겨루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기술을 다하여 접전했다. 기회를 틈타 나오쓰나가 날카로운 공격을 계속 퍼부었으며, 무사시도 그것을 잘 받아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오쓰나의 칼끝이 얕기는 해도 무사시의 미간을 베었고, 무사시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시합은 거기에서 중지되었다.
두 사람이 제자리로 돌아가자 나오쓰나의 승리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사시의 칼끝도 나오쓰나의 이마를 스쳤기 때문에 무승부라는 사람도 있었다.
신체 어디에도 상처를 입지 않은 나오쓰나는 후자의 평가를 듣고,
"분명하게 드러날 때까지 겨루어보자."
하고 노여워하였다.
이렇게 되자 무사시는,
"나오쓰나와의 시합은 이미 끝났다. 동생 나오시게와 시합을 할 차례이다."
라고 요청했다.
요시오카 형제는 무사시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새로 대전하는 날짜를 정했다.
나오시게와 무사시가 시합하는 날, 요시오카 일문은 약속장소로 나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무사시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것을 두고 [요시오카 전]은,

―무사시는 종적을 감춰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세상사람들이 모두 "나오시게는 앉아서 승리했다."

라고, 무사시가 요시오카 형제의 칼이 무서워 도망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천기}가 요시오카 겐보 일족의 완패와 그 이후의 몰락에 대해 기록하고 있음과 대조적으로 [요시오카 전]은 정반대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됐든 요시오카 나오쓰나와 미야모도 무사시와의 시합은 실제로 있었던 일 같다.

{고로다화(古老茶話)}라는 책에 의하면, 장소는 교토의 북쪽 벌판 일곱번째 소나무 아래인데, 무사시가 약속시간보다 일부러 늦게 와서 상대방을 동요케 하려 하였으나, 결국 무승부였다고 한다.
사실 여부가 어떻든 간에 요시오카 일문과 시합을 벌인 이후에도 무사시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무사수업을 쌓았다.
무사시가 [이천일류]라는 이도류(二刀流)를 정리한 것은 50세가 지나서였다. 요시오카 나오쓰나와 대결할 때에는 일도(一刀)의 검법이었다.
무사시는 1624∼1644년 사이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해,
―요시오카 류는 무사시가 그 지위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발판이었다.
라고 {이천기}는 기록하고 있다.

 

4. 사사키 고지로(佐佐木小次郞)와의 대결
약속시간이 지났는데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무사시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고지로. 그것을 기대하고나 있었던 것처럼 무사시를 태운 조그만 배가 수평선에 나타난다.
이윽고 해변가에 내려선 무사시는 깎은 노를 거머쥐고 자세를 취하면서 달려온다.
고지로는 3척 남짓한 장검을 빼어들면서 칼집을 휙 버린다.
그것을 보고 무사시가 소리친다.
"고지로는 졌노라!"

이러한 장면은 지금까지 일본의 영화나 텔레비전에 몇번이고 등장하여 널리 알려져 있다.
무사시를 묘사하고 화제로 삼을 때 가장 좋은 맞수로서 사사키 고지로는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존재이다. 무골이긴 하지만 늘 꾀죄죄한 무사시와는 대조적으로 [비검 제비치기]를 구사하는 고지로는 일반인에게는 화려한 인상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무사시의 저서라고 하는 {오륜서}의 서문에는 무사시가 13세 때 신당류의 아리마 기베에(有馬喜兵衛)와 대결한 후 여러 지방의 무예자들을 상대로 60여회의 결투, 한 번도 진 일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글 중에는 사사끼 고지로의 이름은 없다.
고지로는 무사시를 돋보이게 하는 상대역으로서 {이천기(二天記)}가 더욱 중점을 두고 묘사한 검법자이다.

1612년(慶長 17년) 4월, 무사시는 교토에서 고쿠라(小倉)로 내려갔다.
무사시가 고쿠라를 방문하였을 때에는 마침 고쿠라성 아래로 시가지 조성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시가지 전체는 활기에 넘쳐 있었다.
무사시는 호소가와의 중신 사도 오키나가(佐渡興長)의 저택에 머무르고 있었다. 오키나가는 무사시의 아버지 무니사이의 수제자였다고 한다.
고쿠라에 도착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무사시는 그곳 영주인 호소가와 가의 검법 사범인 사사키 고지로가 높이 평가되어 있음을 들었다.
고지로는 에치젠 정교사(淨敎寺)라는 사찰촌에서 태어나 소도(小太刀)의 명인이자 도미다류(富田流)의 종가인 도미다 세이겡(富田勢源)을 섬기면서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수업중 세이겡이 쓰는 1척 5촌의 짧은 칼의 상대가 되어 3척여 칼을 쓰다보니 어느덧 긴 칼(長太刀)의 기술이 연마되었다.
하루는 세이겡의 동생과 대결해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자신을 얻었고, 세이겡의 문하를 떠나자마자 자신의 유파를 창시하여 간류(嚴流)라고 이름하였다.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많은 검객들을 넘어뜨리고 이윽고 고쿠라에 온 것이다.
이것이 {이천기}에 기술되어 있는, 호소가와 가에 검법사범으로서 영입되어질 때까지의 고지로의 발자취이다.
또한 이 책은 무사시와 대결한 때의 고지로의 나이를 18세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도미다 세이겡이 1558∼1570년 사이에 활약했고, 그 동생이 1592년, 혹은 1594년에 70세로서 세상을 하직했다고 하므로, 1612년에 18세라고 하는 고지로와는 연대적으로 맞지가 않는다. 세이겡의 지도를 받았다고 하면, 상당히 노령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일설에는, 고지로는 도미다 세이겡의 제자이며, 후에 일파를 일으킨 가네마키 지사이(鐘捲自齋)에게서 배웠다, 라고도 한다.
그러나 고지로가 연로한 검술가라고 한다면 이제까지의 이미지가 몹시 손상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무사시와 고지로가 씩씩하고 쾌활한 사나이의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만이 [간류도의 결투(嚴流島의 決鬪)]는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진위는 여하간에, {이천기}에 따라서 양자간의 대결을 살펴보기로 한다.
고지로의 고명을 들은 무사시는 사도 오키나가에게,
"검법자로서 꼭 맞서보고 싶다."
라고 신청하였다.
번주인 호소가와 다다오키도 이론이 있을 수 없어 즉시 양자의 시합을 허락하였다.
시합 장소는 당시 고쿠라 번의 영지였던 후나지마(船島). 시모노세키 남쪽 500미터 거리 바다에 떠있는 조그마한 섬이다.
섬의 모양이 배처럼 되어 있다 해서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으며, 후에 간류도라고 불리어지게 된다.
1612년 4월 12일, 사도 오키나가로부터 내일 아침 시합하게 된다는 통지를 받은 무사시는 그날 밤 행선지를 통고하지 않은 채 사도 저택을 떠났다.
무사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사도 오키나가는 성 안팎을 샅샅히 찾아보았지만, 어디에서고 그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혹시 고지로의 솜씨에 겁을 먹고 도망친 것은 아닐까."
하고 일단 의심을 한 오키나가는 만일을 위하여 시모노세키 방면으로 찾아나서게 했던 바, 시모노세키에 있는 도매상(객주)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있었다.
되돌아오는 편에 보내온 무사시의 편지에는,

내일 아침 고지로는 번주의 배로, 나는 오키나가 씨의 배로 섬으로 건너가라고 분부하셨지만, 시합 결과 여하에 따라서 저에게 배를 빌려주신 분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므로 시모노세키에서 건너가기로 하였습니다.

라는 사연이 적혀 있었다.
시합 후에 영주와 오키나가가 대립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무사시는 배려한 것이다.
날이 밝아 4월 13일.
고지로는 호소가와 다다오키가 이른 대로 진시 2각(오전 7시) 쯤에 후나지마로 건너갔다.
고지로의 차림새는 진홍색 모직으로 만든 소매 없는 하오리에 염색한 가죽 하카마를 착용하고, 바지랑대라고 하는 3척 여의 대도를 허리에 차고 있었다.
한편 무사시는……해가 중천에 솟았는데도 일어나지 않는 무사시를 염려해 도매상 주인이 그가 묵고 있는 방으로 가서 그를 깨웠다.
그런데 무사시는 약속된 시간에 늦지 않도록 하라는 영주의 명령이 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태연히 앉아 식사를 하고, 이어 노를 두 개 구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그 노를 깎아 목검을 만든 후에도 한가로이 차비를 하고 있는 중에 빨리 섬으로 건너오라는 독촉의 사자가 도착하였다.
그제서야 의복을 갈아입은 무사시는 머슴아이가 노를 잡고 있는 작은 배에 올라탔다. 배 안에서도 무사시는 솜옷을 뒤집어쓰고 몸을 옆으로 뉘였다.
한편 섬에서는 경호 무사들이 해변가를 둘러섰고, 긴장어린 공기가 가득차 있었다.
시합 시작할 시간은 벌써 지나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무사시는 당도하지 않고 있다. 고지로는 의자에 걸터앉은 채 초조한 나머지 지쳐가고 있었다.
사시(오전 10시)가 지날 무렵 무사시는 겨우 모습을 드러냈다.
무사시는 대도를 배에 남겨둔 채 소도를 허리에 꽂고, 노를 깎아 만든 목검을 손에 쥐고 배에서 내렸다. 맨발로 천천히 물가를 걸어나왔다.
그것을 본 고지로는 분연히 일어서자마자,
"무사시, 약속시간을 어긴 것은 겁이 나서인가?"
하고 물었다.
그러나 무사시는 들은 척 만 척이다.
고지로는 장검을 칼집에서 뽑아들면서 물가 가까이로 걸어나갔다. 그리곤 칼집을 물 속에 내던졌다.
무사시가 웃으며 말했다.
"고지로, 그대는 졌다. 승자라면 어찌 칼집을 버리겠는가?"
야유였다. 고지로의 안면은 노기로 벌겋게 상기되었다. 고지로는 무사시의 계략에 걸리고 만 것이다.
화풀이라도 하듯이 고지로는 장검을 상단으로 휘둘러 올리자마자 무사시의 미간을 향해 내리쳤다.
그러나 무사시의 머리띠만을 베는데서 그치고 말았다.
고지로의 칼 끝을 간신히 피해낸 무사시는 목검을 날카롭게 휘둘렀다.
그것을 고지로는 피하지 못한 채 머리에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미세한 움직임의 지속(遲速)이 명암을 구분한 것이다.
무사시는 잠시 그곳에 우뚝하니 서 있다가 다시 고지로를 목검으로 치려고 했다. 그 찰나 고지로의 장검이 옆에서부터 날카롭게 날아왔다. 고지로는 아직 목숨이 끊어지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무릎께의 옷자락이 세치 가량 찢겨진 무사시는 날쌔게 뒤러 물러났다가 이번에는 고지로의 늑골을 쳐부셨다. 입과 코에서 붉은 피가 분출하면서 절명하고 말았다.
고지로가 숨진 것을 확인한 무사시는 검사역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후 작은 배에 올라탄 다음 시모노세키를 향하여 떠났다. 이때 무사시의 나이 19세, 고지로는 18세.

이것이 {이천기}에 실려 있는 소위 [간류도의 결투]이다.
후대에 무사시와 고지로의 시합을 주제로 하여 수많은 소설이나 얘기거리가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세상에 널리 떠도는 얘기로는 여러 지방을 편력중이던 사사키 고지로가 이와구니(岩國)의 니시기오비교(錦帶橋)라는 다리 옆에서 날아가는 제비를 베어 떨어뜨림으로써 [비검 제비치기]를 창출하였다, 라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아버지 무니사이가 간류에 의하여 타도되자 무사시가 후나지마에서 간류와 결투, 목검으로써 일격에 쓰러뜨려 보기좋게 원수를 갚았다는 줄거리의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사사키 고지로의 실존에 대해서는 의문스러운 데가 많으며, 설사 실존인물이었다 하더라도 {이천기}에서 그린 바와 같은 달인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지로 뿐만 아니라 검호 중에서 후세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무사시도 실제 경력에 있어서는 의심스러운 곳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소설가 요시가와 에이지(吉川英治)는 {미야모도 무사시}, 무라가미 겐소(村上元三)는 {사사키 고지로}라는 명작을 저술하였고, 그 작품 속에서 각기의 인물상을 선명하게 묘사하였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무사시와 고지로의 이미지는 이러한 작품들에 의한 것이리라.
북규슈(北九州)시 고쿠라에 있는 슈고산(手向山) 공원에는 무라가미 겐소가 건립한 고지로 비가 세워져 있는 바 그 비(碑)에는,

고지로의 눈썹
시원스러운진저
날으는 제비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오륜서}에서 무사시는,

검법의 도를 깨달은 것은 50세의 무렵이었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긴 세월에 걸쳐 끊임없이 각 지방을 돌아다녔으리라.


5. 모소 곤노스케(夢想權之助)와 대결

미야모도 무사시가 하리마(播磨國:兵庫縣)의 아카시(明石)에 살고 있을 때의 일이라고 하니까, 그의 양아들 이오리가 아카시 번주에게 사관되었던 1626년(강에이 3년)경이었을 것이다.
더위가 한창인 여름 어느날이었다.
커다란 붉은 원의 문장을 들인 비단 하오리를 입고, 그 등에는 [병법천하제일 모소 곤노스케]라는 금색의 커다란 글씨를 새겨놓고 다니는 검법자 하나가 무사시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그 뒤로 제자도 여덟 명쯤 거느리고 있었다. 그 거창한 행장으로 보아 이름있는 무예자와 대결하여 승리해서 출세하려는 자임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검법자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나는 모소 곤노스케라는 하는 무사 수행자입니다. 예전에 무사시의 부친인 무니사이님과 겨룬 적이 있었는데, 그후 무사시가 새롭게 기술을 연구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꼭 한번 뵙고 우열을 가리었으면 합니다."
그때 무사시는 앉아서 쏘는 유희용 활을 손질하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의 이름을 내세우며 방문한 곤노스케를 무사시는 안으로 맞아들였다.
무사시의 아버지 무니사이는 십수술에 능하였으며, 그를 계승한 무사시는 십수술을 기초로 하여 이도류(二刀流)를 창안했다는 설도 있다. 곤노스케는 무니사이의 십수술과 서로 싸웠었다는 말인가.
방으로 들어온 곤노스케는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 맞대결을 청하였다.
무사시는 놀이용 활을 다듬으면서,
"그대가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내 기술이 새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하고 시합 신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곤노스케가 거듭 청하므로 마당에서 대결하기로 하였다.
곤노스케는 쇠줄을 넣은 넉자 남짓한 목검. 무사시는 부러진 놀이용 활을 들고 서로 맞섰다.
있는 힘을 다하여 쳐들어오고, 찔러오곤 하는 곤노스케를 다루고 있던 차에 목검의 끝이 무사시의 몸을 조금 스쳤다.
곤노스케는 큰소리로,
"봐라, 맞았다. 내가 이겼어."
하고 자신의 승리를 선고했다.
무사시는 쓴웃음을 지으며,
"참된 맞춤이란 이런 것."
그러면서 곤노스케를 격렬하게 몰아세워, 끝내는 방어하기에 급급한 곤노스케의 미간을 후려쳤다.
큰소리치던 곤노스케는 그 타격에 견디지 못하고 혼절하여 제자들에게 업혀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러나 무사시를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는,
"검법수업, 혹은 관직의 길을 찾아 에도에 온 무사시가 혹시라도 기량이 출중하였다면, 어찌 야규류나 일도류(一刀流)등 쟁쟁한 유파와 대전하지 않았는가."
하고 비방하기도 하고,
"무사시는 전해지는 바와 같은 일류 무예자가 아니고, 이류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다.


6. 미다케 군베에(三宅軍兵衛)와의 대결
{오륜서}에서 미야모도 무사시는,

결투를 한 것은 13세부터 28, 9세때까지의 일이다. 30을 넘어서 지나온 자취를 돌아다보건대, 검법이 탁월하여 승리를 얻은 것이 아니라 나에게 그 방면의 재주가 조금 있고, 천리(天理)에서 벗어나지 아니한 까닭이거나 혹은 타류의 검법이 부족함에 있음을 알게 되었음이다.
그후 더욱 깊은 도를 깨닫고자 조석으로 수련함으로써 스스로 검의 도를 깨달았으니, 이때 내 나이 50세의 무렵이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공명심에 불타 먹이감을 찾는 늑대와 같은 눈초리로 여러 지방을 배회하던 무사시는 30세에 접어들 무렵, 돌연 구도자가 되었다, 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1584년(天正 12년)생이라고 추정되는 무사시가 30세 때라면 1613년(게이조 18년)이다.
다음해인 1614년에 오사카 겨울전투, 다음다음해인 1615년에는 오사카 여름전투가 일어났다.
무사시는 이 두 전투에서,
―도요토미 편에 가담하여 오사카 성에서 농성하였다.
혹은 반대로,
―도쿠가와 군에 가담하였다.
하기도 하나, 두 경우 모두 확증이 없다.
만일 참전하였다고 가정할 경우 도요토미 편이라고 하면 패잔병 소탕시 호된 추궁을 받았을 것이므로 후일의 행동이나 전설 등으로 미루어보아 도쿠가와 편이라고 하는 쪽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겠다.
단 한가지 확실한 것은 검호 무사시는 아무런 전공도 세우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어찌됐든 서른이 넘은 무사시는 가능한 한 진검 대결을 피하며 구도자의 마음으로 여행을 계속했다.
어느 해인가. 미다케 군베에를 비롯한 세 사람이 여행중인 무사시를 찾아왔다.
"무사시님의 고명은 이미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 체재하심을 알고 꼭 지도를 받고자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점잖은 시합 요청이었다. 무사시는 이를 받아들였다.
서로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서로 조금씩 물러났다.
군베에는 목검을 중단세로, 무사시는 대소도 두 자루의 목검을 원극의 자세로 만들었다.
잠시후 무사시는 원극의 자세 그대로 군베에의 코밑까지 파고 들었다.
상단세로 변화시킨 군베에가 즉시 목검을 내리쳤다.
무사시는 두 칼을 분리시키며 공격을 피하여 한발 물러섰다.
재차 군베에가 쳐들어오자 또 다시 두 칼을 떼어서 공격을 피해 한발 물러선 다음, 다시 재빨리 원극의 세를 취했다. 이리하여 출입구를 등뒤에 둔 무사시는 더이상 뒤로 물러날 길이 없어지고 말았다.
상대를 몰아넣은 군베에는 중단세로 고쳐잡고 바닥을 힘껏 차면서 무사시를 향해 덮쳤들었다.
한 대 맞췄다고 생각한 순간,
"위험햇!……"
하는 외침소리가 군베에의 귓전을 때렸다. 이어 불에 덴 듯한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무사시는 상대가 있는 힘을 다하여 뛰어들어오는 것을 역이용하여 '후의 선' 기술을 시도, 볼을 찌른 것이었다. 권투에서 말하면 카운터 펀치인 것이다.
맹렬하게 날뛰던 시절의 무사시였다면 성한 곳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짓뭉개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공격을 멈추고 미소를 띄운 채,
"이런, 피가 흐르고 있군. 빨리 닦으시오."
하고 말했다.
이렇듯 여유로운 행동을 보고 나머지 세 사람은 도저히 무사시에게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군베에와 더불어 즉시 제자가 되었다.

한 자루의 칼만을 사용하던 무사시는 아카시에 살고 있을 무렵, 두 개의 검을 사용하는 법을 창출해냈다.
처음에는 '원명류(圓明流)'라 이름하였으나, 노년에 이도일류(二刀一流), 구마모도의 태승사(泰勝寺) 주지로부터 '이천도락(二天道樂)'이란 법명을 부여받은 후에는 이천일류(二天一流)라 개칭하였다고 전해진다.
미다케 군베에를 상대로 한 시합 얘기의 진위는 어떠하든 간에 {오륜서}에서 보여지는 무사시는 검의 도를 탐구하기 위하여 고뇌를 겪었고, 끝내는 현대인들까지도 강하게 매료시키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무사시의 발자취를 그린 {이천기}는 이천일류의 문하생인 도요다 세이고(豊田正剛)가 무사시의 친제자로부터 들은 바를 기록한 것이며, 아들 세이슈(正修)를 거쳐 손자인 게이에이(景英) 때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7. 창의 명인 다카다 마다베(高田又兵衛)와의 대결
부젠(豊前:福岡縣) 지방에 창술의 명인으로 소문난 다카다 마다베라는 사람이 있었다.
무사시는 부젠 지방에서 수년 간 머무른 일이 있었으므로, 다카다 마다베의 기량을 잘 알고 있었다.

마다베는 무사시보다 6살 연하이다.
보장원 잉에이 수제자인 나카무라 이치우에몽(中村市右衛門)이라는 사람에게서 창술을 배운 마다베는 오사카 겨울전투때 아버지와 함께 오사카 성에서 농성하였으나, 아버지가 전사하자 그 역시 성에서 멀리 떠나버렸다.
마다베가 보장원 잉에이의 집에서 먹고 자고 하는 내제자였다는 설도 있다.
그후 독자적인 기술을 연구하여 보장원류 다카다파를 창시한 마다베에게 많은 무사들이 줄을 지어 입문하였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삼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명령으로 1628년(강에이 5년) 에도 성내에서 창술을 상람케 하였다.
초야에 묻혀 있는 무사시와 비교해 보건대, 마다베 쪽이 검법자로서의 격은 여러 단계 위였다, 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마다베와 무사시가 기량을 겨루어본 것은 고쿠라에서의 일이다.
어느날 그 지방 영주가 두 사람을 불러 시합을 하도록 명령하였다.
처음에는 사양하였으나, 영주가 단념하지 않음으로써 할 수 없이 마다베는 대나무 십자형 창을, 무사시는 목검을 들고 맞섰다.
이 무렵 무사시는 아직 쌍칼을 쓰지 않았고, 하나의 칼만을 사용할 때였다.
중단세를 취한 무사시를 향하여 마다베의 창이 날카롭게 돌진해 들어왔다.
두번까지는 피하였지만, 세번째의 창이 약간 빗긴 듯 하더니 무사시의 사타구니로 들어가고 말았다.
무사시는 그 자리에서,
"과연 마다베 씨입니다. 제가 졌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것을 가로막기라도 하듯,
"별 말씀을. 귀하와 같은 달인에게는 이 창을 도저히 들이댈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어전임을 감안하여 저에게 승리를 양보해주신 걸로 압니다."
하고 마다베는 겸손해 하였다.
영주도 짧은 순간이긴 하지만, 무술의 솜씨가 뛰어난 시합을 목격하고 대단히 만족해 했다.

창술가 마다베는 오가사하라 가신으로 천 석의 녹봉을 받은 상사였다.
어느날 번의 사자로서 기슈 와카야마(紀州 和歌山) 번에 간 일이 있다.
번주 도쿠가와 요리노부(이에야스의 열번째 아들)는 무예자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으며 검법을 유달리 좋아하는 영주였다.
요리노부에게 배알하여 임무를 끝낸 마다베는 그 자리를 물러나고자 하였다.
그때 요리노부로부터,
"그대의 무술 솜씨를 보고 싶다."
라는 청을 들었다.
무예자로서가 아니라 번을 대표하는 사자의 신분으로 와카야마에 온 것이므로 마다베는 사양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을 용인할 요리노부가 아니었다. 결국 마다베에는 요리노부의 신하와 맞설 수밖에 없었다.
마다베는 신속한 기술을 구사해 압승했다. 요리노부는 그 묘기에 감탄하여 크게 포상했다고 전해진다.
또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이 승부가 결정되었으므로 요리노부는,
"다시 한 번."
하고 말했다. 허나 마다베에는,
"제가 섬기는 오가사하라 가에는 죽은 자와 창을 맞대는 관례는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며 불응했다고 한다.

한편 무사시에게는 미야모도 미키노스케(宮本造酒之助), 미야모도 이오리(宮本伊織), 다케무라 요에몽(竹村與右衛門) 등 세 사람의 양자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미키노스케는 히메지(姬路) 번을 섬기었고, 1626년 5월 번주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뒤를 이어 순사하였다.
다케무라 요에몽은 무사시가 에도에서 다케무라라는 성을 사용하고 있을 때 입양된 양자로서, 다카마쓰(高松) 번에 고용되어 있었으며, 1678년 8월에 사망하였다.
양자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이오리 사다쓰구는 무사시의 친형의 둘째아들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15세 때 아카시(明石) 번주의 시동이 되었다가 점차 승진되어, 후에는 봉록 4천 석의 원로직에 종사하다가 1677년 3월 사망하였다.
무사시는 역시 여러 차례 관직에 오를 기회가 있었으나 대우 문제 때문에 무위로 돌아간 바 있고, 그후 양자 이오리의 인연으로 고쿠라에 머물게 되었다.
1640년, 무사시는 구마모도 번주에게 초청되어 고쿠라를 떠났다.
17명의 하인에 현미 3백 석의 급여로 구마모도 번의 손님으로 초청된 무사시는 영주의 명을 받아 1641년 {병법 35개조}를 저술하였고, 2년 후 그것을 증보한 것이 그 유명한 {오륜서}이다.
정착지를 얻은 무사시는 1645년 5월 19일, 구마모도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6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