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맹사성 '우의정'에게 내린 첫번째 재상 임명장 최초 공개
이기환 선임기자 입력[경향신문]
교지연구가 김문웅씨가 공개한 ‘맹사성 왕지’. 1427년(세종 9년) 맹사성을 우의정에 임명한다는 임명장이다. 맹사성 이름 옆에 찍힌 확인점이 뚜렷하다. 김문웅씨는 세종이 찍은 확인점일 것이라 단정했다. 맹사성은 이후 8년간 황희와 함께 정승 투톱체제를 이루며 세종의 치세를 도왔다. 맹사성을 처음 재상의 반열에 올려놓은, 그것도 다름아닌 세종이 내린 임명장이라는 의미가 있다. |김문웅씨 제공
세종대왕이 청백리로서 황희와 함께 정승의 대명사로 통하는 고불 맹사성(1360~1438)을 우의정으로 임명한 왕지(王旨)와 맹사성의 친필로 추정되는 시가 세상에 나왔다. 특히 ‘왕지’에는 세종이 찍은 것으로 보이는 확인점까지 있다. 황희 정승과 투톱을 이루며 세종의 치세를 이끈 맹사성이 정승으로서 첫발을 내디디며 받은 임명장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교지연구가인 김문웅씨(79·전 국가안전보장회의 행정실장)는 13일 세종이 1427년(세종 9년) 2월16일 ‘맹사성을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한다’는 내용의 관료임명장인 ‘왕지’를 경향신문에 공개했다.
■세종의 확인점 찍힌 맹사성의 첫번째 정승 임명장
‘왕지’는 ‘대광보국 승록대부(조선시대 정1품 상계·上階 문관의 품계) 의정부 영집현전경연사 감춘추관사 겸판병조사 세자부자’라 되어 있다. 김문웅씨는 “이 왕지는 임금에게 유학을 강론하는 집현전 소속 경연사 역할과 감춘추관사(지금의 국사편찬위원장), 병조판서를 감독하는 판병조사, 그리고 세자의 스승인 세자부의 역할 등 여러 직책을 겸하도록 했다”면서 “그러나 왕지의 요지는 ‘맹사성을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한다’는 것”이라 밝혔다. ‘왕지’는 명나라 선종(재위 1425~1435) 때의 연호(1426~1435)인 ‘선덕 2년 2월16일’에 작성됐다. 1427년 2월16일이라는 뜻이다. <세종실록> 1월25일자는 “황희를 좌의정, 맹사성을 우의정으로 각각 삼았다”고 했다.
김문웅씨는 “아마도 세종이 인사를 발표한 뒤 정식으로 왕지를 발부할 때까지 20여일의 시간이 걸린 것 같다”고 해석했다. ‘왕지’의 끝에는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는 도장이 찍혔다. 명나라 황제(영락제·재위 1402~1424)가 1403년(태종 3년)에 보낸 도장이다. 이후 성종 때부터는 중국과의 외교문서에만 ‘조선국왕지인’을 찍었고, 각종 교지와 교서에는 ‘시명지보’를 썼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왕지’의 명칭도 1425(세종 7년)~1435년(세종 17년) 사이에 ‘교지(敎旨)’로 바뀐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조선 전기의 ‘왕지’ 중 국보는 1건도 없고, 보물만 11건 지정돼있다. 그중에는 1402년(태종 2년) 성석린(1338∼1423)을 ‘영의정부사 겸판개성유후사사’로 임명한 ‘성석린 고신 왕지’(보물 제746호)와 태종~세종 연간에 활약한 무신 조흡(?~1429)을 1425년(세종 7년) 우군도총제에 임명한다는 ‘조흡 고신 왕지’(보물 제897호) 등이 있다.
무엇보다 조선의 대표 재상인 맹사성의 ‘정승 임명장’이 공개됐다는 것이 주목거리다. 특히 ‘맹사성 왕지’의 ‘맹사성’ 이름자 바로 옆에 찍힌 ‘삐침’이 비상한 관심을 모은다. 김문웅씨는 “이것은 맹사성의 임명장임을 알리는 세종대왕의 확인점일 가능성이 짙다”고 밝혔다. 세종대왕의 치세를 함께 할 인재를 구했다는 안도감과 기쁨이 섞인 ‘확인점’이라는 것이다.
■“이분은 효자입니다” 맹사성의 추천서
김문웅씨는 이 ‘맹사성 왕지’와 함께 맹사성의 친필로 추정되는 ‘(박효자에게) 팔자를 얻어주다(得八字)’는 제목의 시 1편도 공개했다. 맹사성이 ‘견성(전주)에 살고 있는 박씨 효자를 추천하면서 지은 시고’이다.
“…박공이 여기에 거처하며 부모 섬기기를 부지런하고 또 삼가니…이 사람은 순임금의 제자라서 굳이 8명의 원개를 말할 필요가 있으리오. 효도가 그대에게 옮겨졌으니 공께서는 마땅히 맡아 관리하시오.”
‘8명의 원개’는 요순시대 신중하고 현명한 ‘현인재자(賢人才子) 8명’을 가리킨다. 지금 맹사성이 추천하는 전주의 박씨가 바로 그런 현인재자라는 것이다. 맹사성은 따라서 “박씨라는 인물을 쓰면 박씨를 쓰는 당신에게 박씨의 효가 옮겨질 것”이라고 적극 추천하고 있다.고불 맹사성의 친필로 추정되는 ‘팔득자’ 시편. 맹사성이 전주에 사는 박효자라는 인물을 천거하면서 쓴 시가이다. |김문웅씨 제공
흥미로운 것은 이번에 김문웅씨가 공개한 맹사성의 우의정 임명장인 ‘왕지’와 ‘박씨효자 득팔자’ 시편이 영조 연간의 문신인 신경(1696∼?)의 문집인 <직암집>에 그대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양 자료간 한 두 군데 차이는 있다.
즉 ‘왕지’에는 ‘의정부 영(領) 집현전…’으로 되어있는 글씨가 <직암집>에는 ‘의정부 겸(兼) 집현전…’으로 되어 있다. 또 ‘왕지’에는 ‘겸판병조사 세자부자’라고 되어있지만 <직암집>에는 ‘세자부 겸판병조사자’로 되어있다. 또 ‘득팔자’ 시고는 <직암집>에는 ‘박효자 득팔자’라는 제목으로 등장한다. 또 이번에 공개된 ‘득팔자’ 시고에는 ‘재석도당시(在昔陶唐時)’로 시작되는데, <직암집> ‘박효자 득팔자’에는 ‘재석도당세(在昔陶唐世)’로 바뀌었다. ‘시(時)’가 ‘세(世)’로 된 것이다.
김문웅씨는 아마도 <직암집>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다소간 오류를 빚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조선후기 문신의 문집에 등장했던 자료가 300년 만에
신경의 <직암집>에는 ‘맹사성 왕지’와 ‘득팔자’ 시고가 실린 내력을 아주 흥미롭게 밝히고 있다. 즉 맹사성의 후손인 맹숙춘과 맹여화가 본인(신경)을 찾아와 ‘맹사성 왕지’와 ‘득팔자’ 시고를 보여주며 “한마디 말로 기록해달라”고 간청했다는 것이다.
신경은 <직암집>에서 (신경의 조상인) 신개(1374~1446)와 맹사성이 함께 세종의 치세를 이끈 인연을 소개하며 “기꺼이 맹사성을 위한 글을 기록으로 남긴다”고 했다. 특히 신경은 “임진왜란 등 전쟁의 와중에 온전하게 남아있는 문적이 거의 없는데 이렇게 300년간이나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으니 얼마나 기이하고 다행스러운 일이냐”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신경은 나아가 ‘맹사성 왕지’에 찍한 ‘조선국왕지인’ 도장을 보고는 “이것은 명나라 황제가 내려준 인장”이라면서 “명나라가 멸망한 후 이 도장을 보니 눈물이 절로 난다”고 했다. 신경은 이어 “우리 가문(신씨)도 문희공(신개)의 편액이 남아있지만 맹씨 가문의 교지(왕지)와 황제 옥새의 귀중함에 미치지 못한다”고 부러워했다.
신경은 “맹씨의 후손인 맹여화는 ‘왕지와 시고’를 위·아래로 나란히 놓고 합해서 하나의 시첩을 만들어 먼 후손에 전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는 글로 마무리했다. 이 ‘왕지’와 ‘시고’가 이번에 공개된 것이다. 그러고보니 ‘맹사성 왕지’와 ‘득팔자’ 시편은 신경이 300년만에 보았고, 또 이번에 김문웅씨의 공개를 통해 다시 300년 만에 볼 수 있게 됐다.김문웅씨가 공개한 ‘맹사성 왕지’와 ‘팔득자’ 시편은 조선후기 영조연간의 문인인 신경(1696~?)의 문집인 <직암집> ‘서후·書後’에 그대로 소개된다. 맹사성의 후손들이 신경을 찾아와 이 두 자료를 보여주며 ‘문집에 이 자료를 기록해달라’고 간청했다는 것이다.김문웅씨가 공개한 자료들을 <직암집>에 기록된 내용을 비교하면 한두 곳 차이가 난다. 아마도 <직암집>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겼을 것이다.
■황희·맹사성 투톱 체제가 개막됐지만…
‘맹사성 왕지’는 황희 정승과 함께 청백리이자 재상의 롤모델인 맹사성이 재상의 첫걸음을 내디딘 ‘임명장’이다.
알려지다시피 황희(1363~1452)와 맹사성은 해동의 성군이라는 세종대왕의 치세를 이끈 재상 투톱이다. 무려 8년여간 ‘좌의정 황희-우의정 맹사성(1427~1431년)’ ‘영의정 황희-좌의정 맹사성(1431~1435년 2월)’ 체제가 이어진 것이다. 보기드문 장수 재상들이었다.
즉 세종은 1427년(세종 9년) 1월 뇌물수수사건에 연루된 부왕(태종) 시대의 관료들을 전면퇴진시키고 황희를 좌의정, 맹사성을 우의정으로 발탁하는 인사쇄신책을 단행했다. ‘황희·맹사성’ 투톱 체제를 구성한 세종의 의도는 분명했다. 이제 부왕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마음껏 펼치겠다는 선언이었다. 제1·2차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잡은 태종 시대의 공신들을 대신해서 비공신인 황희와 맹사성을 발탁한 것이다. 그런데 ‘황·맹 투톱’은 불과 5개월만에 큰 위기를 맞는다.
황희·맹사성 체제 출범 직전인 1427년 1월 황희가 충청도 신창에서 발생한 사위 서달의 아전 살해사건에 개입하면서 신창이 고향인 맹사성에게 도움을 청한 일이 5개월만인 6월에 뒤늦게 드러난 것이다.
“서달은 황희의 사위인데…신창현을 지나다 고을 아전이 예로 대하지 않고 달아나는 것을 괘씸하게 여겨 잡아와 묶어놓고 때렸는데…이를 본 다른 아전 표운평이…항의하자 표운평을 마구 때려 다음날 죽고 말았다.”(<세종실록> 1427년 6월21일자)
문제는 당시 찬성이던 황희가 판부사였던 맹사성의 고향이 신창이라는 것을 알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를 주선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황희와 맹사성이 서달의 살인사건을 무마하려고 개입한 대형독직사건이었다. 황희·맹사성 투톱체제가 시작되자마자 찾아온 위기였다. 그때는 영의정이 아직 임명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좌의정 황희는 사실상 총리였고 우의정 맹사성은 차상, 즉 부총리였다. 세종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고위관료가 연루된 뇌물수수사건을 마무리 짓고 자신의 주도아래 막 정계개편을 끝냈는데, 야심차게 구성한 의정대신이 개입된 대형비리가 또다시 터지다니….
대간들이 아우성쳤지만 세종은 결단했다. 하루만에 의금부에 구금된 두 사람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좌의정, 우의정에서 파면된 두 사람의 직을 불과 2주만에 회복시켜주었다.
대사헌 이맹균이 “두 사람에 대한 형벌이 너무 가볍다”는 상소를 올리자 세종은 “자네의 말이 옳다”고 수긍하면서도 “그러나 대신의 진용퇴출(進用退出)은 경솔히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황희·맹사성을 보호해주었다.충남 아산에 있는 맹사성의 옛집. 사적 제109호로 지정됐다. 이 옛집을 ‘맹씨행단(孟氏杏壇)’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이란 뜻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죽을 때까지 부려먹은 세종
세종은 이후에도 영의정을 두지않고 약 4년7개월(1427년 1월~1431년 8월) 동안 황희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체제를 유지했다.
맹사성은 황희와 함께 국정전반에 걸쳐 깊이 관여했다. 유능한 인재선발을 위해 과거제 운용에 대한 강경과 제술의 시행방법을 논의했고, 직접 과거시험문제를 출제했다. 맹사성은 특히 예악을 정비하는 문제에 천착했다. 예치사회에서는 예약을 국가통치의 기반으로 한다. 예를 통해 국가질서를 바로잡고 음악을 통해 백성의 마음을 안락하게 만드는 것이 국가통치의 요체였다.
맹사성은 아악을 일신한 박연(1378~1453)과 함께 음악자문 분야에 출중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황희=좌의정, 맹사성=우의정’ 체제는 1431년(세종 13년) 9월 ‘황희=영의정, 맹사성=좌의정’ 체제로 발돋움한다. 우의정에는 권진이 임명됐다. 미완의 체제였던 의정부 기능이 완전히 회복된 순간이었다. 세종시대의 빛나는 업적은 이때 대부분 이뤄졌다. 바야흐로 세종시대 문화의 황금기가 ‘황희·맹사성’ 투톱체제에서 완성된 것이다. 세종은 황희와 맹사성을 극진하게 대우했다.
두사람이 늙어서 기동하기 어렵게 되자 궤장을 하사했고, 노루를 한마리씩 하사하기도 했다. 1435년(세종 17년) 2월1일 맹사성은 좌의정의 신분으로 관직에서 은퇴한다.
‘황희·맹사성’ 투톱체제는 무려 8년간이나 지속됐다. 세종도 대단한 임금이다. 맹사성의 나이 76세까지, 황희의 나이 87살까지 ‘부려먹었으니’ 말이다. 세종은 맹사성과 황희가 은퇴한 뒤에도 중요한 국사를 처리할 때 자문을 요청했다. 맹사성과 황희는 은퇴한 지 불과 3년만에 세상을 떠났으니 세종은 그야말로 ‘황희·맹사성 투톱’의 재능을 그들이 죽는 그 순간까지 활용했던 셈이다. 그래도 두 사람이 79세(맹사성), 90세(황희)로 천수를 누렸으니 그 또한 세종대왕의 홍복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 ‘맹사성 왕지’와 친필 추정 ‘득팔자’ 시편을 공개한 김문웅씨는 “보물로 지정된 왕지가 몇 건 있지만 조선 재상의 롤모델이자 청백리로서 대중적인 이미지를 지닌 맹사성의 임명장, 그것도 세종의 확인점까지 찍힌 유물인 점에서 획기적인 자료”라고 말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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