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日 항복으로 수년간 준비한 '광복군 국내 침투 작전' 무산

태권 한 2019. 4. 9. 14:53

日 항복으로 수년간 준비한 '광복군 국내 침투 작전' 무산

김경택 기자 입력


[연중기획]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3부> 임시정부 군과 외교전략 ② 항일 전투로 존재감 알린 임정
서울 진입 작전에 나섰던 광복군 정진대원들이 1945년 8월 19일 중국 산둥의 유현비행장으로 돌아온 뒤 찍은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서울 진입 작전에 나섰던 광복군 정진대원들이 1945년 8월 19일 중국 산둥의 유현비행장으로 돌아온 뒤 찍은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에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수년 동안 노력한 참전 준비가 모두 헛일이 됐다. (…)우리 청년들을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투시킨 후 조직적으로 공작하게 하려고 미 육군부와 긴밀히 합작했는데, 한 번도 실행해보지 못하고 일본이 항복했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됐다.” 이는 임시정부 정규군인 한국광복군 대원들을 한반도에 침투시키는 작전까지 계획했었는데, 대한민국을 승전국 대열에 올릴 수 있는 기회를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다는 아쉬움을 표현한 것이었다. 광복군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임시정부 스스로 군대를 조직해 대일 무장투쟁에 참여했다는 역사적 의미는 높게 평가된다.

한·미 공동작전 논의를 위해 중국 시안에서 만난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왼쪽) 주석과 미 전략첩보국(OSS) 윌리엄 도노반(오른쪽) 소장. 독립기념관 제공
















한·미 공동작전 논의를 위해 중국 시안에서 만난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왼쪽) 주석과 미 전략첩보국(OSS) 윌리엄 도노반(오른쪽) 소장. 독립기념관 제공


허무하게 끝난 한·미 공동작전

광복군 활동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미국과 손잡고 국내 진입을 시도했던 일이다.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은 1944년 10월 미국 측에 광복군 대원들이 참가하는 정보수집 작전을 제안했다. 이른바 ‘독수리작전(Eagle Project)’이 추진된 것이다. 이 작전에 대비해 광복군 대원들은 45년 5월부터 3개월간 중국 시안(西安)과 리황(立煌)에서 미 전략첩보국(OSS)의 훈련을 받았다. 무전교신 방법과 독도법, 사격술, 폭파술, 도강술 등을 교육받았다.

작전회의는 45년 8월 7일 시안에서 진행됐다. 임시정부에서 김구 주석과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 이범석 지대장이, 미국 측에선 OSS 책임자인 윌리엄 도노반 소장과 훈련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서 광복군은 작전에 필요한 인원을 투입하고 미국은 모든 군사적 지원을 제공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런데 회의 이틀 후 ‘일본이 항복한다’는 소식이 임시정부에 날아들었다. 8월 6일에 이어 9일에도 원자폭탄이 일본에 투하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국내 진입 작전은 그대로 밀어붙인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다만 당초 광복군 제2지대 대원 100명 규모로 계획했던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 대신 선발대 격인 소규모 ‘정진대’를 편성키로 했다. 정진대는 이범석 김준엽 장준하 노능서 4명의 한국인과 미국 측 18명으로 꾸려졌다. 미국 요원에는 한국계 장교 정운수 함용준 서상복 등도 포함돼 있었다.

정진대를 태운 비행기는 8월 16일 시안을 떠나 한국을 향해 출발했다. 이때 일본군이 공격을 준비 중이라는 무전정보가 입수됐다. 정진대는 시안으로 다시 기수를 돌렸고 출발 시점을 이틀 늦췄다. 정진대는 18일 낮 12시쯤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이들에게는 일본군 무장해제뿐 아니라 연합군 전쟁포로를 안전하게 철수하도록 하는 임무도 맡겨졌다. 하지만 광복군 대원들을 비행장에서 맞은 것은 일본군 1개 중대 병력이었다. 일본군은 정진대를 포위한 채 위협 수위를 높였다. 대원들은 결국 19일 오후 2시30분쯤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해 중국으로 돌아갔다. 한반도 진입 작전은 허무한 실패로 끝났다.

광복군 대원들이 1943년 기관총 훈련을 하는 장면. 독립기념관 제공














광복군 대원들이 1943년 기관총 훈련을 하는 장면. 독립기념관 제공



항일전선 확대 못한 광복군의 한계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항일 독립투쟁 선봉에 섰던 군대였지만 전공(戰功)을 세우는 데 한계를 보였다. 임시정부는 대규모 병력을 운용할 만큼 자금을 충분히 모으지 못한 상태였다. 광복군 활동 시점 역시 광복을 코앞에 둔 촉박한 상황이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앞세워 항일 전선을 확대하려고 했지만 중국뿐 아니라 미국도 광복군 전력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를 통제하려고 했던 점도 광복군 보폭을 넓히는 데 한계로 작용했다. 국내 진입 작전의 경우 임시정부와 미 정부가 대등하게 손을 잡은 연합군 형태로 추진하지 못했다. 광북군 대원들과 미 정부기관인 OSS의 합작에 그쳤다.

1939년 11월 11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발표된 ‘독립운동방략(獨立運動方略)’에는 무장군 10만명을 편성해 독립전쟁을 추진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지만 이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독립운동방략은 3년간의 임시정부 추진 방향과 전략을 담은 것이었다. 아울러 임시정부는 1943년 7월 공군을 창설해 대일 항전을 편다는 계획까지 세웠지만 끝까지 추진하지 못했다.

광복군 초창기 활동은 일본군을 교란하는 심리전을 펴거나 적진에서 병력을 꾀어 모으는 일이었다. 이런 심리전이 큰 성과를 냈기 때문에 1940년 9월 30여명으로 창설된 광복군이 45년 8월 총사령부를 포함해 3개 지대 7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는 분석도 있지만 광복군 규모를 정확하게 추산하기는 어렵다. 중국 정부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300명도 되지 않던 광복군 병력을 부풀렸다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

임시정부 출범 직후 항일 무장투쟁 자체가 한동안 위기를 겪은 점도 광복군 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막대한 타격을 입은 일본군은 독립군 기지를 파괴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광복군이 사용한 훈련용 교재와 노트. 독립기념관 제공











광복군이 사용한 훈련용 교재와 노트. 독립기념관 제공


국권 회복을 위한 광복군 독립전쟁

광복군은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의 구심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했으며 광복 이후 국권 회복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역할도 했다. 1942년 1월 발행된 광복군 기관지 ‘광복’에는 ‘최단기간 내 광복군이 교전단체의 자격을 얻지 못하면 장래 전쟁이 끝난 뒤 열릴 세계평화회의에서 우리 한국은 발언할 자격을 얻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국권 회복도 논의할 수 없게 된다’고 돼 있다. 군 관계자는 8일 “광복군은 대한제국군이 해산된 날인 1907년 8월 1일을 창설일로 선포했는데, 이는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 정신을 발휘해나가겠다는 의미”라며 “오늘날 장병들에게 이런 투쟁의 역사는 높은 전투력으로 발현될 수 있는 정신적 유산”이라고 강조했다.

광복군은 또 현대적인 군 조직을 창설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됐다. 임시정부는 1940년 10월 제4차 개헌을 통해 김구 주석을 최고통수권자로, 유동열과 이청천을 군령의 최고책임자로 하는 지휘체계를 갖추도록 했다. 이런 지휘체계는 국가 최고지도자가 군 통수권을 갖고 합참의장급인 국방부 참모총장과 그 아래 각 군을 지휘하는 총참모장을 둔 광복 이후의 군 지휘체계 모델이 됐다.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