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 ‘구직(求職)’이라는 팻말을 걸고 차가운 빌딩 벽에 기대서 있는 허름한 차림의 사내. 점심도 거른 듯 어깨는 처져 있다.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사내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배고픔도 잊은 듯하다. 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양복 입은 회사원들이 카메라에 적게 잡혔다. 그런데도 오히려 사진의 구도 속에서 엄청난 공간을 차지하는 이 사내가 더 왜소하게 느껴지는 아이러니라니.
임응식, '판잣집 거리 , 부산', 1951년. 스페이스22 제공
전후의 현실을 전하는 명장면으로 유명한 ‘구직’ 사진이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에 즈음해 전시장에 나왔다. 서울 강남구 강남대로 대안공간 스페이스 22에서 하는 임응식 사진전 ‘부산에서 서울로’(7월 9일까지)에서다. 이 장면은 종전 직후인 1953년 서울 명동 미도파백화점 앞에서 한국 사실주의의 선구자로 불리는 임응식(1912∼2001)의 카메라에 포착됐다.
임응식, '구직, 미도파백화점 앞, 서울', 1953년. 스페이스22제공
일제강점기에 사진을 접한 임응식은 부산 출신으로, 중학교 입학 선물로 카메라를 받은 게 계기가 돼 사진에 눈떴다. 1931년 부산체신리원양성소(釜山遞信吏員養成所)를 수료한 뒤 일본인 중심 사진동호회에 가입해 본격적으로 사진 활동을 했다. 향토적 서정을 담은 일본풍 살롱 사진에 젖어 있던 그는 한국전쟁 당시 종군사진기자로 참전하며 다큐멘터리 사진의 세계로 돌아섰다. 말하자면 현실에 뿌리를 내린 ‘생활주의 리얼리즘’의 시대를 연 것이다.
이번 전시는 부산에서 활동했던 시기인 1946년부터 서울로 정착하는 1960년 이전까지의 작품을 선별해 보여준다. 도시인의 일상에서 묻어나는 전쟁의 상흔, 폐허를 딛고 일어서려는 사람들의 욕망을 그만의 카메라 언어로 표현했다. 희망을 부여잡으려는 작가의 시선도 감지된다. 다닥다닥 붙은 부산의 판잣집 거리를 찍은 사진을 보자. 동네는 남루해도 그 길을 활보하는 아가씨는 흰 이를 드러내 웃고 있고 치마는 가벼운 발걸음 덕에 살랑거린다.
서울 중앙청 앞에 방어막을 구축한 군인들의 표정엔 긴장과 나른함이 교차한다. 말라붙은 청계천 변에 내걸린 식당의 가격표는 어느 지친 가장이 목구멍으로 넘겼을 장국밥의 뜨거움까지 상상하게 한다. 사진은 이렇듯 한 컷으로 명징하게 한 시대를 증언한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주명덕(80)은 한국의 현존하는 사진작가 가운데 기록 사진의 대가로 꼽힌다. 경희대학교 사학과 시절 대학연합 사진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사진을 알게 됐다. 그를 세상에 호출한 사진의 주인공은 혼혈 고아다. “누나가 자원봉사 나가던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홀트씨 고아원’을 함께 갔다가 본 장면에 가슴이 먹먹했다”는 작가. 한국전쟁이 끝난 지 15년이 됐다. 그런데도 동족상잔의 비극에 참전한 외국 군인과 한국 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 고아의 존재는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주명덕, '섞여진 이름들', 1963-1965년 무렵. 한미사진미술관 제공
보육원의 담벼락. 검은 머리의 고아들과 갈색 머리의 혼혈고아가 함께 한 카메라에 잡혔다. 그늘진 표정의 그들은 사진 속에서 서로 겉돈다. 소외된 아이들은 또 자기 안에서 또 다른 소외를 낳고 있는 것이다. 미군과 이른바 양공주 사이에서 태어났을 것 같은 여아가 정에 굶주린 듯 손가락을 빨고 있는 장면은 애잔하다. 전쟁의 아픈 상처를 들추어내는 불편한 진실인 것이다.
주 작가는 이렇듯 건조할 거라고 생각되는 기록 사진에 주관적인 시선을 담아 감동의 순간을 포착하는데 재능이 있다. 그는 이 고아들을 찍은 사진으로 1966년 4월 서울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포토에세이 홀트씨 고아원’전을 열었다. 전시는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언론에 크게 소개됐다. 그는 아마추어의 껍질을 벗고 전문 사진작가로 거듭났다.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주명덕, '섞여진 이름들', 1963-1965년. 한미사진미술관 제공
서울 송파구 위례성대로 한미사진미술관에서 당시 나왔던 사진을 선별해 ‘주명덕-섞여진 이름들’전(8월 8일까지)으로 소개한다. 1960년대의 서울 모습을 담은 사진도 함께 나왔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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