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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도란 무엇인가?

태권 한 2009. 9. 5. 15:41

궁도란 무엇인가?


1. 궁도의 특징과 효과

궁도는 옛부터 우리민족에게 가장 대중화 된 무예였으며 양반의 자제가 반드시 익혀야 할 필수과목으로 우리 조상들은 이를 통해 심신단련 및 장부(丈夫)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 왔다. 특히 우리민족은 고래로부터 궁시(弓矢)를 제작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을 뿐 아니라 활을 다루는 기량 또한 특출하여 주위 여러 민족이 우러러보았다. 궁도는 이렇듯 조상의 얼과 슬기가 담긴 전통무예를 바탕으로 한 스포츠로서 그 특징과 효과는 다음과 같다.

1) 조상의 슬기와 얼을 만끽할 수 있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 스포츠다.
궁도경기에서 사대(射臺)와 과녁까지의 거리는145m인데 이는 각궁(角弓)의 복원력 및 탄력성이 매우 우수하여 세계 어느 민족의 활보다도 먼거리를 쏘는데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활자체에 조준기(sight)나 스태빌라이저(stabilizer)와 같은 인위적인 기계장치를 전혀 부착시키지 않음에도 적중률은 아주 뛰어나며 화살을 날릴 때 활의 몸체에 오는 충격을 활 자체에서 모두 흡수하므로 인체에 무리가 없다.

2)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는 스포츠다.
궁도는 과격한 운동이 아닌 탓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일생을 통해 즐길 수 있다. 즉 활의 중량강도(重量强度)는 몇 단계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팔의 힘이 약한 사람이라도 자기 힘에 맞는 활을 선택하면 무리가 없이 즐길 수 있으며, 또한 다른 운동과는 달리 신체적 핸디캡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노력하면 명궁이 될 수있다. 그리고 사정(射亭)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모이기 때문에 여러사람과 교제할 수 있다는 사교적인 장점도 갖고 있다.

3) 혼자서 즐겁게 수련할 수 있는 스포츠다.
궁도는 개인 스포츠로 분류된다. 축구나 농구 배구 등이 단체경기인 점에 반하여 궁도는 엄격한 의미의 개인기록 경기인 점이 사격과 같다. 자기와 과녁과의 관계에서 행해지고 성공과 실패의 원칙에 의해서 흥미가 지속되기 때문에 단독으로나 단체로나 똑같이 즐길 수 있다. 또한 외관상 큰 동작과 변화가 없어 즐거움이 없어 보이지만 고즈넉한 사정(射亭)에서 세상의 모든 잡념을 잊고 몰아의 경지 속에서 쏜 화살이 과녁에 적중할 때의 묘미는 활을 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는 기쁨이다.



4) 건강에 알맞은 스포츠다.
궁도는 항상 올바른 자세와 균형을 요구하므로 척추를 신장(伸長)하고 가슴을 튼튼히 하며 언제나 옳고 바른 자세를 갖는 태도나 습관을 기른다. 또한 긴장과 이완의 반복운동이므로 피의 순환을 촉진하고 그것이 내장의 여러 기관을 발달시킨다. 특히 활을 만작(滿作)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단전호흡이 이루어져 호흡기능 발달 및 위장병 치료에 아주 좋은 효과를 나타낸다. 궁도는 신체건강 뿐만 아니라 정신건강에도 아주 좋은 운동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정(射亭)이 산속에 있기 때문에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면서 활을 쏘게 되면 쌓였던 스트레스가 자신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궁도를 하게 되면 근육의 신축성, 근력, 지구력 등이 향상되며 정신집중력도 크게 배양된다.

5) 정신수양으로서의 궁도
궁도는 몸과 마음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무심의 경지에서 활을 쏠 때 비로써 과녁에 적중되므로 정신집중이 경기의 요체(要諦)요, 주된 생명이다. 따라서 궁도를 하게 되면 정신을 집중시킬 수 있는 능력, 자기자신을 이기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등이 배양되어 정신수양에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유학(儒學)의 최고 이념인 인(仁)을 활쏘는 것과 비유해 자는 반드시 활을 쏘아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또한 사정에 올라가 활을 쏘게 되면 선인(先人)들이 남긴 여러 가지 교훈 및 웃어른과 동료들을 대할 때의 예법등을 접하고 익힐 수 있으므로 정서함양과 인격수양에 큰 도움이 된다.

2. 경기방법


현재 궁도 경기는 단체전과 개인전으로 크게 구별된다. 단체전에서는 시·도대표 7명이 출전해 상위 5명의 기록합계로 순위를 정하는 시·도대항전과 사정(射亭) 대표 5명이 출전하는 정대항전이 있고, 개인전에는 유단자(有段者)만이 참가할 수 있는 유단자전(有段者戰)과 무단자(無段者)들이 참가하는 남자개인전, 여자개인전이 있다. 경기방식 및 진행은 각 대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보통 시·도대항전인 경우 각 시·도대표 1명씩을 1개조로, 정(亭)대항전인 경우 같은 사정(射亭)에서 출전한 5명을 1개조로, 개인전인 경우는 참가신청 순위에 따라 7명을 1개조로 하여 대(隊)를 편성하는데 각 대(隊)는 교대로 나와 1순(巡)씩 쏘며, 전체기록 합계로 등위를 결정한다.

3. 경기용구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의 궁시(弓矢) 역시 대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활은 대한궁도협회에서 공인한 각궁과 F.R.P궁 에 한하여 사용되며 시·도대항전 및 종합선수권대회는 각궁만을 사용하여야 한다. 그리고 화살은 죽시만 사용 할 수 있다. 또한 활에는 조준기 등과 같은 인위적인 기계장치 등을 전혀 부착시킬 수 없다.













2.궁도의 역사


1. 삼국시대 이전의 궁시(弓矢)

문헌 및 유적에 의하면 우리민족은 선사시대부터 궁시(弓矢)를 사용했으며 이는 한국 전역에 걸쳐 출토된 타제(打製) 및 마제(磨製) 화살촉으로 보아 분명하다. 역사시대에 들어서면 삼국이전의 부족국가인 부여, 옥저, 예, 마한, 진한, 변한 등에서 궁시의 사용이 활발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보면 "부여는 궁시와 도(刀)와 모(矛:창의 일종)로서 병기를 삼으니 집집마다 갑옷과 무기가 있었다"라고 하여 궁시가 부여의 중요한 무기였음을 알려 주고 있으며 "예(濊)는 모(矛)를 만드니 길이가 삼장(三丈)이라 이것을 여러사람이 함께 들고 보병전에 사용하였으며, 낙랑단궁(樂浪檀弓)이 이곳에서 나온다"라고 하여 그 활이 일찍부터 유명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위지진한전(魏志辰韓傳)에는 "진한(辰韓)은 국명을 방(邦)이라고 하고 궁(弓)을 호(弧)라고 한다." 그리고 "보병전에 능숙하며 병장(兵仗:무기)이 마한과 같다"라고 하였으니 삼한에 활이 있었음이 분명하며 진한(辰韓)에서 철이 생산되었으므로 철제 화살촉을 사용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할 수도 있다.

이외에도 삼한에 궁(弓)이 있었음은 진서(晋書)에 "마한(馬韓)은 궁(弓)과 순(楯:방패의 일종)과 모(矛)와 노(櫓:큰 방패)를 잘 쓴다."라고 기록 되있다. 이상에서와 같이 고조선에 예속하였던 예와 옥저(沃沮)가 궁시를 사용하였고, 인접한 부여와 읍루(相婁)도 이미 궁시를 가지고 있었으며, 고조선과 대립하던 삼한이 또한 궁시를 사용하였던 점으로 보아 고조선에도 궁시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앞에서 기술한 예에 관한 기사중 "낙랑단궁이 이곳에서 생산된다."라고 한 것과 위지(魏志)에 "桓帝)때 예의 사신이 단궁(檀弓)과 기타 특산물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라고 기록된 점으로 본다면 단궁은 본래 고조선때부터 사용된 것으로 예의 땅에서 생산되어 낙랑일대와 기타 여러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던 것이 한사군(漢四郡)설치 이후 중국에 알려짐으로서 중국사람은 그것을 낙랑단궁이라 칭했다고 사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 낙랑단궁은 곧 조선단궁(朝鮮檀弓)이라 할 수 있으며 어느 한 지방에 국한되어 상용되었거나 한사군시대(漢四郡時代)에 비로소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고조선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이것은 그 후 만주지방까지 퍼져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한국 목궁(木弓)의 시초는 곧 단궁(檀弓)이라 할 수 있다.

단궁은 각궁(角弓)이 출현한 후에도 함께 사용된 목궁으로서 그 재료는 단(檀), 즉 박달나무이다. 그러나 점차 전해내려 오면서 산뽕나무와 산비마자(일명 애끼찌나무)가 대신 쓰였다. 산뽕나무와 산비마자는 목궁의 좋은 재료이므로 각각 궁간상(弓幹桑), 궁간목(弓幹木)이라는 별칭이 있으며 특히 궁간목은 탄력이 아주 좋아 좋은 활은 이것을 전체에 다 사용하고 보통 활은 내면만 이것으로 붙였다.


2. 삼국시대의 활

1) 고구려의 활
고구려의 활은 그 성능이 뛰어나 이웃나라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기록도 많다. 즉 위지(魏志)에 보면 "고구려 별종(別種)이 소수(小水:서안평 북쪽에 있는 강)를 근거로 나라를 세웠는데 이로인해 나라이름을 소수맥(小水貊)이라 하며 좋은 활이 나오니 소위 맥궁(貊弓)이 이것이다."라고 하였고 중국 남송의 학자 여조겸(呂祖謙)의 와유록(臥遊錄)에는 "한나라 헌제(獻帝) 건안 10년(고구려 山上王때) 처음으로 익주(翼州)를 정하니 예맥(濊貊)이 질좋은 활을 공물로 바쳤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맥은 고구려가 예맥의 땅에서 일어난 나라이므로 당시 중국에서 고구려를 지칭할 때 쓰던 말이다. 또한 우부강표전(虞溥江表傳)에서는 "오나라 손권(孫權)시대에 고구려는 사신을 보내 각궁(角弓)을 바쳤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손권이 즉위한 때는 고구려 산상왕(山上王) 26년(222년)이므로 이 때에 벌써 고구려가 각궁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단궁과는 다른 맥궁이 곧 각궁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할 수 있다.

2) 백제의 활
백제(百濟)는 마한(馬韓)의 후신이며 역시 부여족(夫餘族)의 일파가 남하(南下)하여 세운 왕국이므로 궁술의 발전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제 21대 비류왕(比流王) 17년(320년)에 궁성 서쪽에 사대(射臺)를 세우고 매달 삭망(朔望)에 활을 쏘았다." 하였고, 주서(周書)에 의하면 "병(兵:병기)은 궁전(弓箭:활과 화살)과 도(刀) 등이 있으며 기사(騎射:말을 타고 쏨)를 중요시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로 보아 백제 역시 궁도를 중요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3)신라의 활
신라(新羅)에 있어서도 궁도(弓道)는 고구려 못지 않게 중시되었다. 신라는 특히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삼국을 병합한 나라였던 만큼 전쟁무기의 중추인 궁시(弓矢)에 대하여 소홀하였을 까닭이 없다.

삼국사기 직관지(三國史記職官志)에 보면 주로 변경(邊境)을 수비하는 이궁(二弓)이라는 부대가 편성되어 있었는데 진덕여왕(眞德女王) 6년에 처음으로 한산주(漢山州)에 설치하고 다음 진평왕(眞平王) 20년에 하서주(河西州)에 설치하였다고 한다. 궁술(弓術)을 관활하던 관원으로서는 법당주(法幢主)에 예속된 노당주(弩幢主) 15명과 법당감(法幢監), 법당두상(法幢頭上), 법당화척(法幢火尺)에 각각 예속된 45명 그리고 법당벽주(法幢酸主)에 딸린 노당(弩幢) 1백35명이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三國史記 新羅本紀)에 보면 "진흥왕(眞興王) 19년(558년) 봄 2월에 나마신득(奈麻身得)이 포노(砲弩)를 만들어 바쳤는데 성 위에 설치하였다."라고 기록된 노(弩)와 같은 병기는 삼국시대 이전에는 사용된 적이 없는 신병기이다. 신라는 포노 이외에도 차노(車弩)를 가지고 있었으며 노(弩)의 제작에도 아주 뛰어났다. 이는 당(唐)이 신라에 교섭하여 노사(弩師:쇠노를 만드는 사람) 구진천사찬(仇珍川沙 )를 초빙하였다는 사실로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사찬은 신라 17등급의 관직중 8번째에 해당하는 관직인데 이로 보아 당시에 신라가 궁시 제작자를 우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삼국시대의 화살

이상의 여러 기록을 통해 부족국가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각 시대에 사용된 활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살펴 보았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양궁(良弓)이나 신라의 경노(硬弩)에 사용된 화살은 어떠한 것인가? 지역에 따라 기후와 산물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된 화살 역시 서로 다르다. 고구려는 호시를 사용하였고 신라와 백제는 죽전(竹箭)을 사용하였다.

호시는 광대싸리로 만든 화살로서 송(宋)나라의 소식(蘇軾)이 지은 순제조석노기(順濟廟石弩記)에 보면 "안사고(顔師古)가 이르기를 "호"는 나무이니 단단하여 유이북(幽以北)에서 화살대로 쓰인다."라고 쓰여있다. 여기서 유(幽)는 고대 12주(州)의 하나로서 지금이 하북성(河北省) 순천(順天), 영평(永平) 및 요녕성(遼寧省)의 금주(錦州) 서북서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한나라 때에는 대(代), 상곡(上谷),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 낙랑(樂浪) 등이 이곳에 속하였다. 따라서 고구려가 가장 강성하였을 때의 영역이 북은 장춘(長春)부터 송화강(松花江) 상류지역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요서까지 이르렀으니 유이북의 핵심지역에 위치하였다고 볼 수 있는 바 고구려가 호시를 사용했음은 의심 할 바 없다.

신라와 백제는 대나무가 자라기 적합한 기후와 토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좋은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고 있었으며 죽전(竹箭), 적(笛) 등 그 사용분야도 광범위 하였다. 또한 신라와 백제가 죽전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기록으로도 남아있는데 삼국사기 견훤전(甄萱傳)과 고려사 태조세가(高麗史太祖世家)의 "신라 경명왕(景明王) 2년 (918년)에 후백제 견훤이 고려 태조가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일길손민극(一吉 閔 )을 파견하여 축하하고 공작선(孔雀扇)과 죽전을 바쳤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단궁과 각궁, 호시와 죽전은 한국 궁시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목궁의 시초가 되는 단궁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그 재료가 변화하였지만 각궁, 호시, 죽전은 시대 변천에 따라 모양은 바뀌었지만 재료, 만드는 방법, 제원 등은 근본적으로 변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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