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의 60년, 로터스에서 케이터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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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월요일 아침 런던. 산뜻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나는 ‘완벽한 한 컷’을 건지기 위해 의회 광장을 대략 18바퀴째 돌고 있었다. 주변 반응은 상당히 뜨거웠다. 자전거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다. 택시 기사들은 창문을 내리고 말을 걸어왔다. 심지어 어떤 일본인 관광객들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설명하는 가이드를 주시하지 않고 우리 쪽으로 눈길을 돌린 채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이런 반응은 이미 예정됐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짙푸른 재킷을 입고 크림색 휠과 붉은 가죽시트, 나무로 만든 스티어링휠을 갖춘 옅은 초록색 스포츠카를 타고 있었다. 심지어 지붕마저 활짝 열어둔 채. 마치 과거에서 불쑥 튀어나온 모습이었지만 호들갑 떨지 않으려고 애썼다. 소화해야 할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다. 그저 300km쯤 떨어진 첫 번째 기착지인 슈롭셔 오스웨스트리 지역 호텔에 해가 지기 전까지 도착하고 싶을 뿐이었다. 바에서 목이나 좀 축이게 말이다.
사실 이번 기획은 매우 훌륭했다. 로터스 세븐 출시 60주년을 맞이해 자동차 여행 특집 기사를 쓰면 어떨까? 거기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영국의 TV 드라마 〈포로(The Prisoner)〉 방영 50주년과 엮으면 더욱 멋지겠다고 판단했다. 연배가 좀 있는 독자들은 알지도 모르겠다. 전설적인 드라마 〈포로〉에서 로터스 세븐을 섭외한 이유는 로터스의 반정부적인 이미지 때문이다. 드라마는 패트릭 맥구한이 연기한 ‘넘버 식스’가 요원 일을 그만둔 뒤 ‘마을’(구성원 모두가 숫자로 된 이름을 갖고 있다)이라 불리는 이상한 공간에 갇힌 후 겪는 일을 그렸다.세븐 스프린트는 세븐 6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모델 중 하나다. 굽이친 도로에서는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3기통 터보 엔진 소리는 쩌렁쩌렁 울린다
우리는 그 마을로 향하기 전 버킹엄 게이트 1번가에서 사진을 좀 찍어야 했다. 넘버 식스가 살았던 신 조지 왕조 풍(20세기에 다시 유행한 19세기 건축 양식) 건축물들을 배경으로 한 사진이 필요했다. 1960년대만 해도 촬영 스태프들이 로터스 세븐에 올라타는 패트릭 맥구한의 모습을 멋지게 찍을 수 있었다. 요즘은 다르다. 주택이 빽빽하게 들어섰고 여기저기 레인지로버로 가득 찬 웨스트민스터에서 마땅한 촬영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촬영을 겨우 마치고 런던을 벗어났다. 케이터햄 세븐 스프린트를 더욱 작아 보이게 하는 이층 버스와 과도하게 큰 SUV가 함께 도로를 달렸다. 작달막한 세븐은 달리는 차 사이 비좁은 틈새를 자유자재로 파고들었다. 덕분에 도로를 내달리는 속도는 점차 빨라졌다.
〈포로〉에 나오는 그 마을은 확연한 이탈리아풍 경치 때문에 분명히 외국에서 촬영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촬영지는 북웨일스 귀네드에 위치한 포트메리온이다. 그곳이 우리의 최종 목적지다. 하지만 내일이나 도착할 수 있다. 우선 장거리 주행을 소화해야 한다. 편하고 빠른 경로를 선택했다. A40 도로를 비롯해 M42, M6, M54, A5 조합이 가장 빨랐다. 세븐의 반짝이는 크롬 전조등을 얼른 그리로 틀었다.창문과 지붕을 열고 달리는 내내 많은 관심을 받았다
세븐 스프린트는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한 주행에 딱 들어맞는 모델이다. 세븐의 60주년을 기념해 딱 60대 한정으로 출시했는데 일주일 만에 다 팔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세한 부분마저 하나하나 눈부시게 아름답다. 복고풍 색상(시승차는 그중 가장 우아한 캠버윅 그린)에서부터 회색 파우더로 코팅한 섀시, 크림색 휠, 붉게 물든 가죽시트, 모탈리타 나무 스티어링휠, 트렁크에 부착한 예비 타이어, 예전 케이터햄 마크까지 실로 눈부시다. 이 차를 타면 전설적인 배우 패트릭 맥구한과 가까워진 기분마저 든다. 작달막한 스포츠카에 당시의 느낌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앞유리를 통해 밖을 바라보면 부서질 듯 약해 보이는 와이퍼에 잠시 눈길이 머문다. 그러다 이내 크롬으로 감싼 전조등이 달린 기다란 보닛으로 시선이 돌아간다. 차가운 나무 스티어링휠 뒤에는 검정색 바탕에 하얀 글씨를 새긴 복고풍 스미스 계기판이 보인다. 요즘 나오는 모델에는 찾아볼 수 없는 아이템이다.
런던에서만 해도 참된 스포츠카 분위기를 경험하기 위해 지붕을 활짝 열고 달렸다. M40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요즘 차의 실내가 그리워졌다. 바람에 의해 끊임없이 몸이 뒤흔들려서 머리를 바짝 낮추고 운전해야만 했다. 끝내 지붕을 덮을 때가 됐다는 뜻이다.
지붕을 닫고 20분쯤 지나니 실내가 따뜻해졌다. 하지만 세븐을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야 한다는 암울한 현실은 그대로였다. 외국에서 건너온 대형 트럭은 물론이고 다른 차 운전자들조차 막히는 고속도로에서 이 자그마한 세븐을 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터다. 아슬아슬한 순간이 종종 다가왔다. 고속도로에서 세븐이 불편한 이유는 크기 때문만이 아니다. 세븐으로 장거리를 여유롭게 이동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6단에서조차 고막 터지기 딱 좋을 정도로 시끄러웠다. 시트도 마찬가지다. 조금만 더 푹신하면 좋겠다.
드디어 중간 기착지에 도착했다. 세븐을 타고 온종일 약 320km를 달린 후라 진한 고단함이 온몸 구석구석에 퍼졌다. 물론 세븐은 단 한 번도 편안한 차였던 적이 없다. 애초에 그렇게 설계한 차도 아니다.
이야기를 좀 돌려야겠다. 로터스를 설립한 콜린 채프먼이 당시 자신이 갖고 있던 오스틴 세븐을 경주용으로 바꾸고자 했던 1940년대 후반으로 가보자. 결과적으로는 훗날 다양한 로터스 모델이 탄생했지만 세븐은 1957년에야 등장했다. 철로 만든 스페이스 프레임 섀시와 그 위를 덮은 부드러운 알루미늄 패널로 형태를 만들고 오스틴과 포드의 부품을 이리저리 조합해 만들었다. 초기 모델은 조세법을 피하고자 반조립 제품인 CKD 키트로 판매했다. 몇 년 뒤 엔진을 비롯해 많은 부분을 개선한 모델로 살짝 업데이트했다. 1970년대 초 완전 조립 상태로만 판매하도록 법률이 바뀌었다. 세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야 사실대로 말하지만, 영 볼품없는 시리즈 4의 생김새 때문에 세븐은 의심할 여지 없이 퇴색했다. 채프먼도 결국 이때 세븐에서 손을 뗐다.
당시 로터스 딜러였던 그레이엄 넌이 아니었다면 세븐의 이야기는 그쯤에서 끝났다. 서리 지역에 있던 넌의 케이터햄 전용 차고는 세븐의 판매와 수리를 담당하는 작업 공간이 됐다. 넌은 세븐의 생산권을 얻기 위해 수년 동안 셀 수 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1973년에야 마침내 생산권을 사들이는 데 성공했다. 세븐의 생산도 재개했다. 새 생명을 얻은 모델은 당시 최신형이던 시리즈 4가 아니다. 좀 더 예쁘게 생긴 시리즈 3이었다. 그렇게 이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기본형인 160에서부터 흉포한 620R까지 갖춘 현재 세븐 라인업은 로터스의 전성기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이에 대해서 충분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다시 날이 밝았다. 어제보다 훨씬 상쾌했다. 중앙분리대가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몇km 달리니 어느 순간 북웨일스가 눈앞에 펼쳐졌다. 처음에는 돌담길 사이로 웨일스 특유의 아담한 집들이 늘어선 풍경이 보였다. 다음에는 구불구불한 언덕과 호수와 숲이 나왔다. 바로 이곳이 케이터햄의 고장이다. 오래된 토요타 RAV4를 타고 가는 주민 몇을 제외하면 길이 텅 비어있었다.
세븐 스프린트는 160을 기반으로 만들었다. 생기 넘치는 뒷차축과 얇고 작은 폭 155mm 타이어, 짧게 밀어 넣는 5단 수동변속기, 터보차저를 올린 스즈키제 660cc 3기통 가솔린 엔진 구성이었다. 이 차를 다루는 핵심은 페이스 유지다. 급한 코너에서 힐앤드토를 사용하거나 연속 코너에서 직선도로를 달리는 리듬으로 내달리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세븐은 아주 유쾌하고 즉각적이다. 3기통 터보 엔진에서 새 나오는 휘파람 같은 터빈 소리만 아니면 패트릭 맥구한이 활동하던 1967년으로 완전히 되돌아갈 수 있을 듯했다.
구불구불한 언덕과 텅 빈 도로를 계속해서 달리니 귀네드 교외 지역이 시야에 들어왔다. 포트메리온을 알리는 이정표가 군데군데 보였다. 그대로 따라가니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작은 마을에 들어섰다. 1925년부터 1975년 사이 영국 건축가 클러프 윌리엄스-엘리스 경이 설계하고 시공한 이 마을의 위치는 북웨일스 해안 끄트머리다. 지중해식 건물이 즐비한 이곳에서 넘버 식스는 감옥에 갇혀 정보 기관의 감시를 받았다.
종영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곳에서 〈포로〉의 인기는 여전하다. 넘버 식스 복장을 한 나, 그리고 세븐 스프린트와 함께 기념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적이는 런던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다. 넘버 식스라면 아마 이렇게 말하고 떠났을지 모른다. “또 봅시다!”
로터스 세븐
공식적인 이야기는 바로 이 모델로부터 시작한다. 로터스를 설립한 콜린 채프먼은 1946년 그의 오스틴 세븐을 갖고 장난삼아 경량 경주차 아이디어를 끄집어냈다. 로터스의 다양한 자동차는 1957년 세븐으로 종결됐다. 판매는 조립식으로 했다. 포드와 오스틴의 부품을 여기저기 사용했다.
로터스 세븐 트윈캠 SS
SS는 슈퍼 세븐을 의미한다. 시리즈 2에서 처음 선보였다. SS는 가장 강력한 모델이다. 엔진은 코번트리 클라이맥스. 시리즈 3 세븐은 1969년에야 SS를 내보냈다. 로터스 엘란에 사용한 1.6L 8밸브 엔진을 넣었다.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케이터햄 세븐 프리즈너
1980년대 후반 모델부터 로터스 모델과 본격적으로 구분되듯, 이 모델이야말로 진짜 케이터햄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점이다. 가변식 밸브제어 시스템을 채용한 로버의 1.8L K 시리즈 엔진을 품은 모델도 있었다. 수많은 부분을 함께 싹 다 개선해 선보였다. 대미는 프리즈너 특별판이었다. 초록색 차체에 코가 노란 그 모델이다. TV에 나온 차와 아주 똑 닮았다.
케이터햄 CSR 260
평범한 세븐과 닮아 보일 수도 있지만 CSR은 철로 만든 튜브형 스페이스 프레임 섀시에 대시보드, 센터콘솔 등을 붙여 만들었다. 강성을 높이기 위해 변속기가 들어갈 공간도 따로 마련했다. 뒤쪽 서스펜션은 더블위시본. 보닛 아래 코스워스가 손본 포드의 2.3L 엔진을 품었다.
케이터햄 슈퍼라이트 R500
케이터햄 사상 가장 흉포한 모델은 아마도 슈퍼라이트 R500이다. 탄소섬유 차체와 가볍고 질긴 케블라로 만든 시트, 263마력을 내는 4기통 2.0L 엔진, 차동제한장치, 6단 시퀸셜 변속기를 쓴다. 앞유리는 없다. 케이터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모델이다.
케이터햄 620S
현재 케이터햄의 라인업 중 가장 과격한 모델. 트림은 S와 더 단단한 R이 있다. 무게당 마력비가 무려 516마력에 이른다. 60년 전 원조 로터스 세븐의 머나먼 외침으로부터 이어진 경쾌하고 민첩한 천성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
글 · 제임스 바첼러(JAMES BATCHELOR)
사진 · 피트 깁슨(PETE GIBSON),나단 모건(NATHAN MOR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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