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청도관
청도관은 9개 모체관 가운데서 가장 먼저 1944년에 개설되었다.
청도관은 '푸른 파도'를 의미하고 청년 기상과 활동력을 상징으로 삼았으며, 청도관의 '도(濤)'는 이원국 자신이 무술을 익힌 쇼도깐(松濤館)의 '도(濤)'를 차용하고 있다. 창설자인 이원국(1907~2003)은 일본 주오(中央)대학 법학과 재학당시 쇼도깐에 입문하여 공수도의 개조로 알려진 후나고시 기찐(船越義珍) 문하에서 5년 동안 수련을 받아 4단을 취득했다. 그후 그는 일제말기인 1944년 1월에 귀국하여 서울 서대문구 옥천동 소재 당시 영신중학교 강당에서 '당수도'라는 이름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하나 본격적으로 당수도를 보급하고 문하생을 양성한 시기는 1946년 2월 서울 종로구에 있는 시천교당 자리에 '당수도 청도관'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으로 가라테 보급에 나섰다.
당시 시천교당을 수련장으로 사용했던 청도관 수련생들은 예배시간을 피해 오후 5시경부터 밤늦게까지 수련을 했다고 한다. 그후 안국동으로 청도관을 옮긴 이원국은 얼마 있지 않아 당수도 연무대회를 개최했다. 명동의 시공관에서 열린 이 연무대회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무술대회로 일컬어진다. 연무시범은 당수도 기술체계를 답습한 형과 권법이 주류를 이뤘다. 이원국이 사회활동을 했기 때문에 수련 지도는 주로 유응준과 손덕성이 맡았다.(승급심사는 6개월에 한번씩)
1946년 노병직이 고향인 개성에 정식으로 송무관 간판을 내걸자 이원국은 손덕성, 엄운규 등 제자들을 이끌고 개성에 가 연무시범을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1951년 초 이원국이 일본으로 밀항을 하면서 청도관 관장직을 둘러싸고 손덕성은 내분에 휘말린다. 최홍희와 엄운규는 연계하여 손덕성을 압박하였다. 최홍희는 1959년 9월 3일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하면서 이사에 손덕성을 제외하고 엄운규를 임명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손덕성은 청도관과 태권도계에서 소외되어 1963년 3월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이후에 관장은 엄운규에게 이어졌다.
청도관의 분관은 이용우의 정도관, 광주를 중심으로 한 고재천의 청룡관, 인천을 중심으로 한 강서종의 국무관 등이 있다. 최홍희의 오도관도 청도관에서 파생된 관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청도관 출신으로는 유응준, 손덕성, 엄운규, 이용우, 현종명, 민운식, 남태회, 백준기, 고재천, 우종림, 정영택, 이준구, 한인숙, 김서종, 곽근식, 김석규, 한차교, 조성일, 김봉식, 최기용, 이사만 등이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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