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관 남태희 원로의 한국 방문과 태권도 작명의 비밀
태권도史에서 핵심적인 인물로 알려진 청도관의 남태희 원로가 한국을 전격 방문 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8년만의 한국 방문 이지만 태권도史 측면에서 그의 방문은 28년 만에 이루어진 공식적인 한국 방문이자, 세계태권도연맹(WTF)과 남태희 원로가 이끌고 있는 태권도 선구자들의 모임인 세계태권도연합회의 협력차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1972년 국제태권도연맹(ITF) 최홍희총재의 망명과 함께 도미한 남태희 원로는, 그동안 태권도란 무도명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최홍희총재와 함께 중축적인 역할을 했지만 오랫동안 그의 이름을 제도권에서는 사장 시켜 왔습니다. 태권도란 무도명이 생성되는 과정에서 일부 사람은 태권도란 고유명사를 남태희 원로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어쨌던 태권도란 말은, 1954년 1군 사령부 2주년 기념식 당시,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당수도 연무 시범을 보였던 계기가 되어 이 대통령의 태껸이란 말에서 어원(語源)이 되어 만들어 진 것은 정론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는 최홍희 총재와 남태희 원로의 합작이란 설(說)과 최홍희총재 개인의 작품이란 설(說)도 있어 그동안의 의견이 분분 하였지만, 이번 남태희 원로를 만나면서 들은 것과 생전에 최홍희 총재 에게 들은 것을 바탕으로 정리 해 봤습니다. (사진:남태희 원로와 대태협 강원식 역사편찬위원장)
-최홍희 총재의 생전 증언은, 태권도의 "태(跆)"자는 본인이 어렵게 옥편에서 찾아낸 것이다-
필자는 태권도 작명에 관련해서 생전에 최홍희 총재로 부터 여러번 들을수 있었습니다. 최홍희 총재의 생전 증언에 의하면, 1954년 1군 사령부 시범에서 남태희를 비롯,군(軍) 시범단(당수도 시범단)원들이 시연후, 이승만 대통령이 "저것은 태껸이야! 앞 으로 전군에 보급 시키도록 해!" 이 대통령으로 부터 이 말을 들은 최홍희총재는 남태희 부관을 불러 태껸의 "태"를 의논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옥편에도 흔치 않았던 "태"자를 자신이 한학을 했기 때문에 발견하고 "태"자와 함께 손수(手)위에 갓머리가 있는 "권(拳)"-주먹을 상징해서 "태권"을 정하고 인명(人名)으로 표현 하자면 성(姓)에 해당하는 도(道)를 붙여 "태권도"라 명명 하였다고 했습니다.
해방이후 당수도,공수도 등으로 전국적으로 확산 되었던 이땅의 무도는 왜색 일변으로 국내에서 처음 접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최홍희 총재는 일본에서 유학을 했지만 해방전부터 일본에 맞서 평양학병을 주도하고,한국군을 창설하는 등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활동했습니다. 해서 그는 해방이후 일본에서 유입된 공수,당수도를 우리식의 무도명으로 개명을 생각 하던차 이승만 대통령의 태껸의 말에서 태권도를 작명했다고 전했습니다.
-남태희 원로는 태권도의 "태"자는 자신이 옥편에서 찾았다고 주장-
태권도사를 연구하면서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면, 필자는 남태희 원로(태권도사에는 남태희 대위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대령으로 예편) 였습니다. 태권도란 무도명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남태희 원로의 직접적인 관여는 최홍희 총재도 인정 했던 부분도 있었지만 오도관 관계자들과 함께 태권도 학자들은 남태희 원로의 역할을 여러가지 측면에서 해석 해왔습니다.
태권도 작명의 실마리를 듣기 위해, 20년을 돌아서 이번 한국 방문에서 남태희 원로를 만날수 있었던 것은 필자에게는 행운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팔순을 훨씬 넘긴 남태희 원로는 지난 태권도사의 무게를 감당하듯 지팡이를 의지한체 필자와 박성진기자를 맞이 하였습니다.(처음 만남은 태권도조선의 박성진기자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오랫동안 궁금했던 태권도 작명의 그때로 돌아가서,남태희 원로는 태권도사의 한축을 기록하는 실마리를 풀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당시 시대적 상황과 인물들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시연한 그때를 마치 파노라마 사진을 펼쳐 놓은 것처럼 상세하게 들러 주었습니다. (사진:남태희 원로의 젊은 시절 연무)
1954년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당수도 시범을 하기 위해 흰도복을 입고 장병들 앞에서 나설때 흰도복을 처음 본 다른 장병들은 낄낄대고 비웃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도복의 띠는 흰띠,자띠(적),검은띠 밖에 없었지만 구분이 단순해서 청띠를 만들어서 메고 시연에 나섰다고 합니다.( 남태희 원로는 그때 청띠가 처음 도입 되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15분 정도의 당수도 시연을 하는 동안 이승만 대통령 단상에는 이형근 대장을 비롯 당시 최홍희 장군이 자리를 하고 있었으며 예정된 시연이 끝나고 이승만 대통령이 조금더 해보라는 생각지도 않았던 명령으로 시연을 위해 연습한 것 외에 즉석으로 보여줄수 있는게 마땅하지 않아서 남태희 원로는 한차교를 불러내어 겨루기 시연을 15분 정도 했다고 합니다.
당시 남태희 원로는 기왓장12장을 정권으로 격파 하는 시연을 했는데, 멀리 있는 단상에서 관람한 이대통령이 손으 가르키며 저것은 무엇으로 격파 했는지 묻자, 옆에 있던 최홍희 장군이 정권을 가르치며 이대통령에게 당수(수도)가 아닌 정권으로 격파했다고 설명 했습니다. (사진:정권을 보여주며 이대통령에게 남태희의 격파를 설명하는 최홍희장군)
시연이 끝나고 이대통령은 앞으로 오늘 시연한 태껸을(당수도) 전군에 보급 시키라고 했습니다. 최홍희 장군은 남태희 대위(당시)를 자기 방으로 불러 태껸이 아닌 다른 무도명을 고민 했던것은 당수도와 태껸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고, 해서 왜색의 당수도를 벗으나 우리식의 무도명으로 개명을 고민하던차 남태희 대위에게 옥편을 가지고 "태"자를 발견하게 하고 남태희 대위는 당수,공수의 수(手)를 벗으나 조금더 무게감 있는 갓머리가 있는 주먹 권(拳)을 조합해서 "태권"이라 명명하고 무도의 도(道)를 붙혀 "태권도"라 정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태권도"는 당시 실세있는 사람을 통해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제가를 받아 이대통령이 친필로 "태권도"를 붓 글씨로 쓰고 그 왼편에 자신의 호(운암)을 쓰서 세상에 내 놓았다고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태권도" 당시의 친필을 두고 오랫동안 제도권 역사에서는 가짜라고 주장하고,지금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필자는 여러 정황을 보아서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태권도는 사실 이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사진:이승만 대통령의 태권도 친필)
그동안 김운용에게 상납한 태권도역사 학자들은 아직까지 자신들의 기록을 합리화 하려고 여러가지 사실들을 거짓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번 남태희 원로의 방문에서도 밝혔듯이 태권도역사의 진실을 더이상 호도하지 말고 그동안의 잘못된 기록을 고수하고 가르친 것을 자인하고 잘못을 정식으로 인정 해야 할것입니다. (남태희 원로의 오도관 시절 시연)
-최홍희 총재와 남태희 원로의 태권도 작명의 비밀은?-
생전 최홍희 총재와 이번, 남태희 원로로 부터 직접 태권도란 작명 과정을 기록하면서 필자 나름데로 정리 해보고자 했습니다. 남태희 원로는 이번 한국 방문중에 여러 언론과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태권도 타임즈의 이현기 발행인, 그리고 관계자의 주선으로 태권도 초창기의 산증인이라고 할수 있는 강덕원 초대 관장(일부는 홍정표라고 주장)과 경무대 초대 지도 사범을 지낸 박철희 노사(79세)와의 만남입니다. 태권도사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남태희 원로와 박철희 노사의 만남이 주는 의미는 태권도사에서 중요한 시간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사진:2010년 3월 30일 남태희 원로와 박철희 노사)
태권도사에서 가장 중요한 태권도 작명의 과정을 여러번 인터뷰한 남태희 원로를 지켜 보면서 태권도의 작명가, 태권도의 창시자, 그리고 남태희 원로가 주장하는 태권도 창시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은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최홍희 총재의 주장과 남태희 원로의 주장에서 상반되는 부분도 있지만 자세히 살펴 보면 두 사람이 같이 주장하는 태권도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숨어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태권도의 발생 과정에서 기록 하지 않았던 제도권의 태권도사(김운용이 만든 태권도사)를 태권도 작명 과정의 주역인 두사람의 증언으로 밝혀 진것입니다. (사진:1960년대 후반 싱카폴을 방문중인 육영수 여사와 남태희 원로)
태권도 작명가는 최홍희 총재와 남태희 원로 두 사람입니다. 굳이 "태"자의 발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면, 이승만 대통령의 태권도 작명의 공로(?)역시 재 조명 되어야 합니다. "태권"의 작명 과정에서 서로의 주장은 다르지만 위 두 사람이 조합해서 만든것은 태권도사에 이제라도 올바르게 기록 되어야 합니다. (사진:남태희 원로, 박철희노사, 조상민관장, 이현기 태권도타임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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