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공개된 금강산 '삼일포'.."자주 오시라"
서재준 기자 입력
2008년 관광 중단 이후 민간 행사에 첫 공개
'금강산 적송' 어우러진 해금강 자락..늦가을 물든 금강산
금강산 삼일포의 가을 풍경. 하얀 집은 '단풍관'이라는 이름의 휴게소. 2018.11.5/뉴스1 © News1 서재준 기자
(금강산=뉴스1) 서재준 기자 = 금강산 관광지구가 위치한 강원도 북측 지역 온정리에서 동쪽으로 12㎞. 차로 30여 분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삼일포'라는 이름의 호수가 있다.
온정리에서 동쪽으로 이 정도 거리를 나가면 필연적으로 동해 바다가 나타난다. 그런데 삼일포는 바다가 아니라 호수다. 원래 이곳은 바다와 연결된 포구였으나 3000년 전에 토사가 흘러 바닷물을 막으며 호수가 된 석호라고 한다.
'삼일'이라는 이름은 실제 사흘을 뜻한다는 것이 북측 안내원의 설명이다. 과거 어떤 왕이 영동의 절경을 찾아 이곳에 도착해 하루를 머물려다 절경에 취해 깜빡 사흘을 머물고 말았다는 설화가 있다. 이 왕이 신라의 경순왕이라는 설이 있으나 사료로 확인된 바는 없다.
신라시대의 '4선', 네 명의 신선이 놀다 간 곳이라는 설화도 있다. 호수에는 작은 정자가 설치된 섬이 있는데, 이곳에서 신선인 영랑(永郞)·술랑(述郞)·안상(安祥)·남랑(南郞)이 놀았다고 한다. 그래서 정자 이름도 사선정이다. 어떤 설화가 정답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 호수가 신라시대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은 확실한 듯하다.금강산 삼일포의 가을 풍경. 왼쪽에 신라시대에 네 명의 신선이 놀았다는 정자인 '사선정'이 보인다. 2018.11.5/뉴스1 © News1 서재준 기자
금강산의 산맥 중에서도 바다에 닿아 '해금강'으로 불리는 지역에 위치한 삼일포는 36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인 호수다. 바다와 육지의 연결 지점인 포구로 기능한 과거를 보여 주듯, 크지 않지만 고즈넉한 백사장도 있다.
백사장에서는 작은 배를 타고 호수로 들어갈 수도 있다. 사람이 노를 저어야 하는 배는 '다섯 딸라(5달러)', 모터가 달린 보트는 '열 딸라(10달러)'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탓에 실제 배를 타진 못했다.
대신 삼일포까지 흘러내린 금강산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다. 단풍으로 붉게 불타는 산이라고 해서, 가을 금강산을 특별히 '풍악산'이라고 부른다. 늦가을로 접어든 11월 초의 금강산에서는 불타오르는 위용을 확인하긴 어려웠지만 잔잔하게 잦아든 모닥불처럼 포근하게 마음을 감싸는 정취가 있었다.
한 시간가량 금강산 특유의 암석 고개를 오르내리며 풍경을 감상한 뒤 백사장에 앉아 숨을 돌리니, 절로 눈이 감겼다.
지난 3일 남북 민화협의 금강산 공동행사를 위해 이곳을 찾은 256명의 남측 민화협 대표단은 삼일포의 이 나른한 금강산의 가을을 만끽했다. 관동팔경 중 하나인 삼일포가 남측의 민간 방문단에 공개된 것은 지난 2008년 금강산 관광 중단 이후 처음이다.
남측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과 북측 민족화해협의회는 창설 20주년 기념 공동행사를 금강산 관광 재개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금강산에서 열었다. 닫혔던 삼일포, 금강산의 시간처럼 남북 민화협이 다시 만나는 데에도 1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금강산 삼일포 휴게소 '단풍관' 앞에서 판매 중인 돼지고기 꼬치. 2018.11.5/뉴스1 © News1 서재준 기자
금강산 삼일포 휴게소 '단풍관' 앞에서 판매 중인 감자전. 2018.11.5/뉴스1 © News1 서재준 기자
눈이 감기는 나른함을 깨운 건 코를 자극하는 냄새였다. 삼일포 한편에 조용히 자리한 휴게소인 '단풍관' 앞에서 흑돼지 꼬치구이와 감자전, 자연산 홍합인 '섭' 찜을 팔고 있었다.
정해진 일정에 맞추느라 등을 떠밀듯 채근하는 안내원들의 외침을 모른척하고 3달러짜리 꼬치구이 하나를 사서 욱여넣었다. 적당한 숯불 향 사이에 달큼하고 짭짤한 양념이 배어 있었다. 사실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살짝 소리를 낼 정도였다.
남측에서부터 우리를 인솔한 '조장(가이드)'은 금강산 관광 중단 직전까지 현대아산 소속으로 현지에서 일했다고 한다. 이 조장이 "삼일포에서 꼬치구이 팔면 꼭 한번 드셔 보라"라고 했는데 역시 베테랑의 조언은 들어서 손해 볼 것 없다 싶었다. 코에 밴 숯불구이 향이 좌우로 늘어선 금강산 적송(赤松)과 해송(海松)의 향을 막았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북측 안내원이 우리 측 방북단에 금강산 삼일포를 안내하고 있다. 2018.11.5/뉴스1 © News1 서재준 기자
"옛날에 어떤 왕이 이곳에 하루 동안 놀려고 왔다가 경치가 하도 아름다워서 여기서 무려 3일 동안을 묵어갔다고 해서 삼일포라고 부릅니다."
남측 방문단을 오랜만에 만나는 것은 북측 안내원 역시 마찬가지다. 분홍색 체육복을 입고 허리에 작은 엠프(스피커)를 찬 안내원은 또랑또랑하지만 자세하고 친절하게 삼일포를 안내했다.
그와 달리 검은 양장 스타일의 당복을 입고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초상휘장을 단 북측 인사들은 종종 대북 제재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고, 마치 노력을 인정해달라는 듯 깨끗하게 관리한 삼일포와 금강산을 좀 보라며, 북측 특유의 호소력 있는 어투를 자주 구사하기도 했다.
남북을 합쳐 10여 대의 버스가 줄지어 지나가는 풍경은 삼일포 인근의 북측 주민들에게도 오랜만일 것이다. 관광을 위해 별도로 닦인 길과 주민들이 다니는 길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탓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주민들 얼굴의 자세한 형태까진 알아볼 수 없었다. 다만 주민들의 얼굴이 우리 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민간 행사라 그런지 남북 당국 간의 공식 행사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다. 북측 인사들도 기자가 말을 걸어도 전혀 주저함 없이 대화에 임했다. 여기에 관광 코스 중 하나였던 삼일포까지 둘러보니 마치 1박 2일 코스의 금강산 관광을 온 기분마저 들었다.
방북 일정의 첫 식사는 옥류관에서 했다. 금강산 관광지구에는 평양 옥류관의 분점이 있는데 관광이 중단된 뒤로 한동안 운영을 멈췄다가 북한 당국이 중국 등 외국인 관광객을 금강산에 받으며 다시 영업을 재개했다고 한다.금강산 관광지구 내 옥류관에서 평양냉면과 녹두전이 어우러진 식사를 하는 우리 측 방북단 일원. 2018.11.5/뉴스1 © News1 서재준 기자
녹두전 한 장, 삼색 나물 한 접시에 평양냉면 한 그릇을 포함한 식사 한 끼가 10달러다. 구수한 면수를 먼저 마시고 짭조름한 육수와 함께 면을 먹으니 예상보다 풍부한 맛이 좋았다.
특이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정상회담 일정 중 방문한 대동강수산물식당에서 제공되는 철갑상어 요리가 이곳에도 있다는 것이다. 불고기나 철갑상어 요리가 포함되면 30달러, 50달러 순으로 가격이 높아진다는 것이 북측 접대원의 설명이다.
옥류관 내 매점에서는 다양한 북측 음료와 술을 팔고 있었는데 단연 인기가 높은 것은 대동강 맥주, 들쭉술 등 남측에도 잘 알려진 상품들이다. 2달러짜리 캔커피와 배 단물 등의 음료도 구비돼 있었는데 이제 북측에서도 병이 아니라 캔에 든 음료가 자연스러워진 듯하다.
'언제부터 여기 매점이 이렇게 잘 구비됐느냐'라고 물으니 매우 친절하게 "원래 그랬단 말입니다"라고 답한다. 다시 '오랜만에 바쁘시죠'라고 물으니 "바빠도 이렇게 남측에서 자주 오시면 더 좋겠습니다"라고 답한다. 이런 류의 대화에서 '대북 제재'를 빼먹지 않는 당국자들의 말보다 한결 부드럽다.금강산 옥류관 내 매점. 각종 술과 음료를 판매 중이다. 2018.11.5/뉴스1 © News1 서재준 기자
금강산 관광지구 내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상당수는 인근 온정리 주민들이다. 금강산의 아침 풍경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모습이다.
방 베란다에 서서 주민들의 출근길을 구경하고 있자니 그들도 내가 구경거리였나 보다. 몇 그루의 소나무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동그란 피부색 점이 계속 나를 응시하며 멀어졌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북측 출입사무소 통과 과정에서도 달라진 기류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대한민국' 등 북측의 입장에서 보기 적절치 않은 책이나 문서를 압류하긴 했지만 "갈 때 가져가시오"라는 말투나 태도는 퉁명스럽지 않고 유연했다.
10년 만에 만난 전현직 현대아산 직원들과의 조우에 반가워하는 북측 당국자도 있었고, 남북 당국 간 행사 때 유독 기자들에게 '까칠하게' 굴던 북측 세관 직원들의 모습도 없었다.
남북의 통문,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오가는 사이사이에 철도가 보였고 우리 일행은 금강산을 오가는 길에 남북 철도 공동조사 구간에 포함된 '금강산 청년역' 옆을 지나갔다.
남북의 경계에 따라 가로등의 형태와 도로의 포장 방식이 바뀌는 도로를 달리며 "과거 1700회의 남북 간 접촉으로 지뢰를 제거한 곳이 이곳"이라는 설명을 듣고 괜히 한번 발로 땅을 '쿵' 찍었다. 당위성을 떠나 남북이 아직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것은 분명해 보였다.
북측으로 향할 때, 관광 중단으로 다소 허름해진 우리 측 고성군 일대를 지나 고요한 긴장을 유지한 비무장지대(DMZ)를 통과하니 느닷없이 평화로운 금강산 풍경이 나타난다. 느닷없다는 말 외에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었다.
내려오는 날. 휴대폰도, 인터넷도 먹통인 금강산에서 다시 DMZ, 고성을 지나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불과 이틀 만에 교통 체증에 남측 귀환을 실감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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