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족산 '몰캉몰캉' 황톳길 14.5km '맨발의 자유'를 얻다
대전 | 김형규 기자 입력
[경향신문] ㆍ여긴 몰랐지? 숨어있던 관광도시 ‘대전’계족산 황톳길은 맨발로 걷는 길이다. 부드럽고 시원한 찰흙이 발가락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촉감에 묘한 해방감이 느껴진다. 천천히 한걸음씩 내딛다 보면 시야는 넓어지고 이내 기분이 상쾌해진다.
계족산 허리 빙 두르는 ‘맨발 걷기’ 코스…한 발 두 발 천천히 낯선 감촉 음미하며 내딛다 보면, 자연과 풍경도 느리게 품을 수 있어
계족산성 위에 서면 청주까지 한눈에 ‘근사한 풍광’…산비탈에 들어선 대동벽화마을서 석양 감상, 장동마을선 꽃바람 만끽
대전으로 출장은 여러 번 가봤어도 여행지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잘 몰라서 그랬다. ‘교통 요지’ 대전은 의외로 관광 도시다. 둘레길이 아름다운 대청호부터 문재인 대통령이 여름휴가 때 찾은 장태산 자연휴양림까지, 대도시 이미지와 달리 넉넉한 자연을 품은 천혜의 관광지가 많다. 이번엔 계족산 황톳길을 걸었다. 맨발로 숲길을 걸으며 부드럽게 정수리를 어루만지는 가을볕을 오래도록 즐겼다.
■ 맨발로 걷는 즐거움
대전의 북동쪽 외곽에 자리 잡은 계족산은 해발 423m의 아담한 산이다. 산줄기가 닭발처럼 뻗어나갔다 해서 계족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계족산에는 산허리를 빙 두르는 14.5㎞의 황톳길이 있다. 이 길을 맨발로 걷기 위해 전국은 물론 해외에서까지 연간 100만명의 관광객이 몰린다.
길은 대덕구 장동마을의 장동산림욕장 입구에서 시작한다. 신을 벗고 양말도 벗고 황토 위에 맨발을 올려놓는 순간 낯선 감촉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부드럽고 시원한 느낌이 묘한 해방감을 부채질한다. 한 걸음 두 걸음 떼다 보면 발가락 사이로 몰캉몰캉한 흙이 비집고 들어온다. 바닷물이 빠진 갯벌을 걷는 것처럼 딛는 발걸음마다 괜히 흥겹다.
푹푹 빠지고 미끌미끌한 황톳길에선 평소처럼 빠르게 걸을 수가 없다. 한발씩 천천히 음미하며 내딛게 된다. 천천히 걸으면 시선이 달라진다. 앞만 보고 가는 게 아니라 옆도 보고 뒤도 돌아보고 하늘도 한 번 올려다보게 된다. 길가엔 잘 익은 알밤과 도토리가 드문드문 떨어져 있다. 먹이를 주우러 나온 다람쥐가 인기척에 놀라 부리나케 숲으로 달아나는 모습도 이 길에선 흔한 풍경이다.
등산로 한쪽으로 약 2m 폭으로 조성된 황톳길은 구불구불 이어진다. 산길은 경사가 심하지 않아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오를 만하다. 중간중간 발 씻는 곳이 있어서 힘들면 언제든 맨발 걷기를 중단할 수도 있다. 군데군데 설치된 조각작품도 카메라를 꺼내 들게 하는 볼거리다. 작은 수레에서 파는 아이스크림과 막걸리 한잔은 기분 좋게 땀 흘린 뒤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계족산 황톳길은 충청지역 소주회사인 맥키스컴퍼니 조웅래 회장(60)이 만든 길이다. 사연이 재밌다. 2006년 계족산을 방문한 조 회장은 하이힐을 신고 온 일행에게 운동화를 벗어주고 맨발로 산행을 했다. 그날 밤 평소와 달리 머리가 맑아지고 단잠을 잔 그는 맨발로 걷는 즐거움을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황톳길을 조성했다. 지금은 충남 아산·당진 등 인근 공원과 수목원에도 계족산을 본뜬 황톳길이 여럿 생길 정도로 반응이 좋다. 매년 5월 열리는 맨발축제 때도 인파가 몰린다.
트럭으로 황토를 쏟아붓는다고 길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일년 내내 걷기 좋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매년 2000여t의 질 좋은 황토가 등산로에 새로 깔린다. 비가 와서 유실되면 다시 채워넣고 햇빛을 받아 딱딱해진 흙은 수시로 뒤집고 물을 뿌려 촉촉하게 만들어야 걸을 만한 길이 된다. 황톳길 중간의 공연장에선 맥키스오페라단이 펼치는 무료 숲속음악회 ‘뻔뻔(fun fun)한 클래식’ 공연이 4월부터 10월까지 매 주말마다 열린다. 천천히 산책하며 자연을 만끽한 뒤 문화생활까지 즐길 수 있으니 일석이조의 코스다. 황톳길은 한 바퀴 돌려면 4~5시간이 걸린다. 완주가 부담스럽다면 계족산성까지 1시간 남짓한 코스만 걸어도 좋다. 벗은 신발을 담을 신발주머니와 나중에 발을 씻고 난 뒤 물기를 닦을 수건을 준비해가면 좋다.
■ 노을에 젖고 코스모스에 취하고데이트 코스로 좋은 계족산성 성곽길.
황톳길 중간쯤 산 중턱에 정상부의 계족산성으로 향하는 길이 나 있다. 경사가 다소 가파른 길은 나무데크와 좁은 등산로가 번갈아 이어진다. 나무뿌리와 자갈이 얽힌, 바닥이 울퉁불퉁해 여기부터는 신발을 신고 가는 게 좋다. 느린 걸음으로도 30분 정도면 산봉우리에 자리 잡은 계족산성에 닿는다.
계족산성(사적 355호)은 삼국시대에 백제가 신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여러 산성 중 하나다. 당시 대전은 백제의 영토 방어를 위한 주요 관문 중 하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전은 한반도 중심에서 영호남을 연결하는 교통 허브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대전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산성을 보유한 도시가 된 이유다. 백제가 대전에 만든 산성은 50여개가 넘는다. 계족산성은 그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큰 석성이다. 성벽의 높이는 2~10m, 성 둘레는 1037m에 이른다.
최근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한 산성은 동·남·서쪽에 각각 성문이 하나씩 있고 봉수대와 우물터가 두 개씩 남아 있다. 봉수대는 조선시대까지 통신시설로 사용됐다고 한다. 성벽을 찬찬히 살펴보면 산 능선 바깥 경사면을 깎아내 외벽을 돌로 쌓고, 성 안쪽은 흙을 정교하게 다져서 쌓은 모습이 보인다.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견고한 구조물을 만들어낸 게 새삼 놀랍다. 성 안쪽의 건물터에선 12~13세기의 청자 조각과 토기 조각들이 발굴됐는데 고려시대까지 산성의 기능이 지속됐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한다.계족산 정상에서 바라본 대청호.
구태여 지루한 역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계족산성은 그 자체로 방문할 가치가 충분한 곳이다. 힘들게 산길을 올라간 고생을 보답이라도 하듯 성벽 위에 서면 근사한 풍광이 화답한다. 산등성이 너머 남쪽으로는 대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동쪽으로는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대청호 물길이 손에 잡힐 듯하다. 더 멀리는 충남 공주부터 충북 청주 땅까지, 첩첩산중 너머로 아스라이 펼쳐진다. 억새풀이 자란 산 정상과 성벽길을 한가로이 거니는 이들 중엔 외국인 관광객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높다란 석축 위에 나란히 걸터앉아 산 너머로 시선을 던지는 연인들의 표정은 더없이 부드럽고 넉넉하다. 노을이 질 무렵 사진을 찍으며 데이트하기 좋은 장소다.대동하늘공원의 석양‘골목길 갤러리’ 같은 대동벽화마을.
대전 시내에도 석양을 감상하기 좋은 장소가 한 곳 있다. 산비탈에 들어선 대동벽화마을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모여들며 형성된 부락이다.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낡은 건물과 담장에는 최근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다양한 그림이 그려져 ‘골목길 갤러리’처럼 변했다. 달동네 꼭대기에는 대전 원도심이 한눈에 펼쳐지는 대동하늘공원이 있다. 공원은 어스름 해 질 무렵이면 사진 촬영을 하러 온 사람들과 연인들로 북적인다. 공원 한복판에 선 풍차와 그네의자 등은 아기자기하면서도 로맨틱한 소품 노릇을 톡톡히 한다. 주변에 카페가 많아 붉게 물드는 도시를 바라보며 쉬어가기도 좋다.장동마을 코스모스 꽃밭.
가을 꽃바람을 즐기고 싶다면 계족산 아래 장동마을로 가보자. 매년 가을 만개하는 코스모스 꽃으로 유명한 곳이다. 장동삼거리 인근 경관농업단지 4만여㎡를 가득 채운 코스모스 꽃밭이 장관을 이룬다. 원두막과 나무그네, 탐방로 등이 잘 갖춰져 있어 사진 찍기도 쉬어가기도 편하다. 코스모스 축제는 9월 말 끝났지만 늦가을까지 피어있는 코스모스는 가을 분위기를 즐기기에 모자람이 없다. 인근 산디마을의 생태공원 캠핑장은 도심에서 멀지 않고 오토캠핑도 가능해 캠핑족에게 인기가 높다.
대전 |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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