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쓰다 소키치(津田 左右吉)

태권 한 2020. 9. 25. 17:06

단재 신채호가 우리 민족주의 사관의 아버지라면,
쓰다 소키치(津田 左右吉, 1873년~1961년)는 한국 '식민주의 사학'의 원조이다.
총독부 조선사 편수회원으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 등

조선 식민사학 이론을 만들어낸다.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한사군이 평양을 비롯한 한반도 북부에 존재했으며 한반도 남부에는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하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이상은 역사관련 사전에 나온 내용이다.
실제 현 한국 친일사학(?)의 거두 이병도가 이 쓰다 소키치의 제자이니
그가 한국 사학계에 미친 영향은 가히 악마적(?)이라고 할 만하다.
한국역사학계의 범주에서 본다면, 같은 시대의 단재 신채호(1880~ 1936)와 가장 극단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일본인이다
하지만 그는 제국주의자도 천황제 옹호론자도 아니다.
‘텐노 헤이까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는 일본 극우 국수주의 학자는 더더욱 아니다.
아니 반대로,
1940년 〈일본상대사의 연구 日本上代史の硏究〉(1930) 등 4권의 저서에서, 천황의 존엄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우익으로부터 고소되어, 금고 2개월, 집행유예 1년형을 선고받고 대학교수 직에서 해임되는 탄압을 받기도 한다.
그도 나름 당시 일본의 양심이자 객관적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쓰다는 고전비판에 의해 일본·중국의 고대사·사상사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했으며, 다방면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사관은 랑케주의에 입각한 실증사관이다.
이 실증사학은 서양에서도 엄청난 혁명이다.
가령 서양 중세에서 성경에 나오는 여러 사실은 당연한 진실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실증주의의 관점에서 바라 본다면, 이것은 하나의 신화이자 민담일 뿐이다.
비로소 중세의 암흑을 벗어나는 근대 역사학의 출발이 되는 것이다.
랑케의 실증주의 사관은

엄격한 사료(史料) 비판과 사실(원사료)에 충실한 있는 그대로의 서술을 강조하였고, 역사가는 그 사실을 알리는 역할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성경이 사료(史料)라 한다면, 역사(성경)기록에 있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일주일만에 이 세상을 급조(?)하였다는
'창조론'을 무조건 맹신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면 아무리 성경 구절에 있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종교적 믿음에 불과하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논리이다.
랑케는 이러한 객관주의로 역사학의 독자적인 연구시야를 개척하여 근대 사학을 확립 · 발전시킨 ‘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이것은 근대학문이 가지는 '맹점'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엄밀성과 객관성을 추구하는 긍정성의 기초이기도 하다.
즉 의사가 환자를 대할 때 어떤 선입견도 가지지 말아야 하는 냉정함과 같다.
환자의 지위고하와 친소(親疏)여부를 따지지 않고 냉정하게 인체를 살피고 병의 진척을 살피는 것과 같다.
그 뒤에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담아야 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이에 비해 단채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 연구에는 명확한 목적의식이 있다.
침탈당한 국권을 회복하고 조선의 자부심을 높이며, 우리 민족의 발전지향을 역사학 연구를 통해 찾고자 한 것이다.
이와 같다면, 과연 쓰다의 실증주의사관과 단재의 민족주의 사관이 친일사학과 민족사학이라는 이름으로 양분하고 선과 악의 대립으로 몰아가는 지금의 역사인식이 과연 정당한지 묻고 싶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 ‘임나일본부설’과 같은 몇 가지 잘못된 연구 결과들은 분명 '친일사학'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써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비판과 학술적 오류임을 증명하는 최대의 성과는 민족주의사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친일사학이라 매도되었던 실증주의 사학의 성과였다는 점은 매우 아이러니컬 하다.
심하게 말하면, 민족주의 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을 감정적으로 욕하기 바쁠 때, 친일사학으로 매도되었던
한국의 실증주의 사학자들은 엄밀한 자료분석과 사실을 바탕으로 임나일본부설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거짓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이제는 일본과 한국 사학계 모두에서는 더 이상 임나일본부를 정설로 받아드려지지 않는다.
친일사학으로 매도 당하는 한국 실증사학의 ‘공로’인 것이다.
한국 실증사학에도 우리 민족의 양심과 객관적 이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내로남불....
“내가하면 로멘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는 식의 주관적 자의성의 극치는 이 친일(?)사관과 민족사관의 대립 속에 명확하게 나타난다.
먼저 단재 신채호식 민족사관의 입장에서 상고사(上古史)를 보자.
13세기 말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記)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史) 제1권 고조선 조(條)에
단군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중국의 역사서인 『위서』(魏書)에는
단군 임금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하고 조선이라는 국호를 썼으니 중국 요(堯)와 같은 시대(B. C. 2333)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단군조선이 요임금 때 건국된 것이라는 구체적인 『위서』의 기록을 보유한 중국이, 정작 자신들의 역사를 서술할 때는 요임금 시대를 역사로 보지 않고 ‘신화’로 보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국이 5천년 역사를 주장할 때 얼마전까지 중국은 자신들의 역사를 3천년이라고 말하는 웃지못할 헤프닝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결국 중국은 그동안 『위서』의 기록을 역사가 아닌, 신화의 기록으로 판단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설사 『위서』라는 역사서에 요, 순임금의 치세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에 대한 객관적인 유물이나 자료가 없는 이상 역사가 아닌 신화의 전승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그랬던 중국이 요즘 ‘단대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요,순,우,탕의 상고 신화(?)를 정식 역사로 편입시켜 3천년을 5천년으로 늘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그 과정에서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 등 만주지역 한국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 시키는 동북공정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나름 민족주의 사관인데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역사 침략의 새로운 중화사관, 또는 사대주의 사관이 되는 셈이다.
일본으로 가보자.
우리가 단군 조선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논증하는 방법으로 일본의 민족사학자들은 <일본서기>와 <고사기> 등 신화적인 사료들을 근거로 고대 천황제를 역사적 사실임을 강변한다.
사실 임나일본부설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는 보통 4가지가 제시되고 있다.
그 중 핵심적인 것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적힌 내용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國)과 4읍(邑)을 점령하였고,
그 뒤 임나(任那:伽倻)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일본 극우 국수주의 사학자들은 이와 같이 민담 구전 같은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한반도 침략의 근거를 찾았던 것이다.
사실 가야사 연구를 다시 해야 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교시(?)에는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이 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그 동안의 한국 민족주의 사관의 연구 관행에 따르면 이 임나일본부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 될 확률이 높다.
<일본서기>는 우리로 치면 <삼국사기>쯤 되는 사료적 가치를 가진 8세기 당시에 편찬된 일본의 역사서이다.
이런 중요한 사료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으니 ]
그동안 우리 민족주의 사학의 연구 관행에 따르면 빼도박도 못하는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이다.
특히 19세기 이후에 조작된 사료라는 시비가 있는 < 환단고기>같은 사료에 나오는 이야기라며 '대 쥬신제국'의 고대사 환타지(?)까지도 역사적 사실이라고 광분하는우리나라의 속칭 '환빠'들의 논리에 따르면 임나일본부설은 논의할 필요도 없이 확증된 역사적 실재가 된다.
설사 <일본서기>라는 사료 문헌에 나오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명확하고 객관적 근거가 없다면 이를 의심하고 부정할 수 있다는 실증주의 사학의 시각만이 이 '임나일본부설'의 허위성을 밝혀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에게 민족사관이라 불리는 역사연구 방법론이 일본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통하여 조선침략을 정당화 했던 수구 꼴통 국수주의 '황국사관'의 연구 방법론과 다를게 없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실제 당시 쓰다 소키치 류의 학자들은 랑케주의적 실증주의 관점에서 <일본서기>와 <고사기> 등 일본 고대 사료(史料)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이로 인하여 쓰다는 천황제를 부정하였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게 되고 교수직에서 해임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친일사학의 원조라고 비판받는 인물이 일본에서는 자신의 학문적 양심과 객관성에 의해 일본의 극우 군국주의와 몽환적 천황제에 대립되는 연구결과로 인하여 탄압받는 헤프닝성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쓰다 또한 당시 일본인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설에 동의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고, 천왕의 고대적 기원을 의심하지만, 현재적 천황제에 대해서는 수긍하는 등의 학문적 객관성과 애국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사실 이와 같은 모습은 근대인의 보편적인 갈등이다. 나 또한 학문의 객관성과 개인의 신념 속에서 수 많은 갈등을 한다)
하지만 쓰다의 실증주의 사관은 단군조선의 실재성을 의심하는 논리로, 일본 천황제를 의심하였고,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초기부분을 신뢰하지 않는 논리로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로 인하여
‘단군’을 부정하듯 ‘일본 천황’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다면,
과연 쓰다와 이병도류의 실증사학을 단순하게 친일사관으로 매도할 수 있을까???
다시 고대 한민족 역사지도를 어마어마하게 확대하는 <환단고기> 식의 논리를 단순하게 민족주의 사관이라고 미화 시킬 수 있을까???
쓰다의 실증주의가 친일사관이라면, 그는 왜 일본의 민족적 국수주의를 깨뜨리는 연구 결과를 내 놓았을까?
단재 신채호에서 급기야 <환단고기>류까지도 민족사학이라 말한다면, 천황제를 옹호하고 환타지 일본고대사를 역사적 사실로 둔갑시키는 일본 극우의 국수주의 사관 또한 일본의 민족사관이라 하여야 하지 않나???
전형적인 내로남불이지 않는가???
하하하하
이것이 내가 민족주의자들을 싫어하고 우습게 보는 가장 큰 이유이다.
명확히 알아라.
문제는 실증주의 사학이 아니다.
이것은 역사 연구의 한 방법론일 뿐이다.
진정한 문제는 식민사관이 아니라, 식민지 역사정책이다.
일본 자국의 역사에는 국수주의적 민족사관을 적용하여 천황제를 옹호하면서도, 식민지 조선의 역사에는 실증주의 관점으로 단군조선을 부정했던 '내로남불'의 총독부 역사정책이 원흉일 뿐이다.
지금 우리는 이 총독부 역사정책을 고스란히 되풀이하고 있다.
우리 역사는 로멘스이고 남의 역사는 모두 불륜이라고 몰아간다.
일본의 천황제도 불륜이고, <일본서기>와 <고사기>도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불륜이고 ‘동북공정’도 역사침략의 불륜이라고 말하면서 똑같이 실증적 관점에서 증명받기 어려운 단군조선만은 로멘스라고 말하는 것이다.
싸우면서도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민족사학은 총독부의 역사정책과 싸우면서 참 많이도 닮아가는 것 같다.
과연 누가 식민지 역사의 잔재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일본은 2차세계대전 패전이후 공식적으로 '황국주의 사학'을 폐기한다.
실증사학의 토대 위에서 일본역사를 다시 재정립한다.
하지만 그 황국주의 사학은 그 맥이 끊긴것이 아니다.
물론 일본 내에서는 극우주의자에 의해 근근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도 하지만 더 크게는, '천황'이라는 주어가 '단군'으로 바뀌어 '민족주의 사학' 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지 한국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친일'이고 무엇이 '민족'인가??? 
물론, 나도 실증사학에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다.
쓰다가 어절 수 없는 일본인이듯이 나 또한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도리어 단군 조선의 역사성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민족주의자이다.
아니 식민사학의 후예라고 매도되는 다수의 주류 역사학자들 또한 아마 민족주의자들일 것이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반드시 ‘타산지석’이 있어야 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사관을 타산지석으로 삼는다면 결코 <환단고기>류의 고대사 침략주의를 긍정할 수 없다.
중국도 동북공정을 통하여 자신들의 민족사관을 정립하고 있지 않는가...
2017년 6월 28일에 포스팅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