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의 역사 반세기!!!
오로지 태권도 그 자체만을 따질 때 현대화된 태권도의 역사는 비교적 짧다. 태권도라는 명칭도 1955년 4월 11일 이승만 초대대통령에 의해 허가된 것이고, 그 뒤 1962년 태수도로 바뀌었다가, 태권도 명칭을 만든 장본인인 최홍희씨가 태수도협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국기 태권도'로 다시 바뀐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태권도라는 것이 우리 민족적 토양에서 자란 무술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우리 무술의 원류는 그 역사가 매우 깊다. 그 역사를 되짚어 보면 중국의 소림권보다 우리 고대의 무술이 더 뿌리가 깊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현대에서 태권도의 역사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 것은 그런 역사적 사료에 의해 기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체계화된 태권도의 정확한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초기 태권도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일반 태권도 교본이라든가 자료들에서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런 점은 1970년대 이후 태권도의 정통성 확립이라든가 주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태권도 역사 역시 인위적으로 통합해 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태권도인의 시각이 아닌 언론인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기술되었다고 평가받는 태권도 서적 [ '한국무술 미대륙 정복하다' 이호성 저. 1995]에서 인용.발췌하여 적어보도록 하겠다. 고려시대까지는 우리 고유무술에 대한 기록이 역사서에 간간히 기록 되어있을만큼 전통무술이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조시대로 접어들면서 무예를 천시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면서 맨손무술에 대한 전승이나 기록도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두 번에 걸친 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국토가 쑥대밭이 되버린후 무술에 대한 각성차원에서 무예도보통지의 저술이나 무술시합이 한동안 성행하기도 했으나, 그것도 잠시였고 태껸과 씨름,국궁(활) 말고는 그외의 무술형태가 민간에 전승되어 내려온 투기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그리고 조선이 일제에 의해 망해 버린후 그나마 남아있던 우리무술은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에 의해 그 명맥을 유지하기가 더욱 힘들어 졌다. 광복이 되자 한국의 고유 무술인 태껸이 소수의 전승자(송덕기옹 등)에 의해 다시 나타났지만, 고유 무술의 자리를 채운 것은 일제시대에 우리 나라로 건너온 당수도(가라데)와 유도였다. 1950년대 말에도 우리나라에서 체계화된 우리무술이 존재하지 않았고,무술이라면 당수도.유도외에 소수의 중국권법등이 있었다. 당수도, 즉 공수도는 일제시대에 한반도의 일본도장에서 수련한 이들과 일본에서 귀국후 도장을 연 이들에 의해 퍼져나갔다. 기록으로 보면 한국최초의 도장은 광복되기 두달전에 문을 연 '당수도 청도관'이다. 청도관은 초대 관장 이원국씨에 의해 세워졌고 6.25후 손덕성씨에 의해 재건되었다.손덕성씨는 그후 최홍희씨와의 마찰에 의해 도미하였고 엄운규씨가 그 뒤를 이어 청도관 관장이 되었다. 필자가 왜 태권도 역사를 다루면서 한국 공수도의 계보를 따라가는지 궁금한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기 태권도의 역사를 다루자면 당수도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기에 그렇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앞에서와 같이 2대 '당수도 청도관'의 관장이 된 손덕성씨는 도미하여 미국에 태권도를 널리 전파한 분이시고, 엄운규씨는 후에 WTF(세계태권도 연맹)의 부총재를 연임하셨던 분이다. 청도관에 이어 용산에 '철도국 도장'이 생겼다.관장은 황기로 3년뒤에 당수도 도장인 '무덕관'을 개관하였고, 청도관과는 라이벌 관계였다고 한다. 황 기 관장은 1960에 홀로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여 사단법인 수박도회라는 협회를 만들었으나 1961년 5.16군사 정변이후,모든 관이 태수도 협회로 통합되어 해체되고 말았다. '광복 후의 한국 민간 도장은 청도관,무덕관.지도관.창무관.송무관등 5대 문파가 있었다.이 오대 문파의 관장중 실종된 전장섭,윤병인을 제외하고,청도관의 초대 관장 이원국,2대 관장 손덕성.무덕관의 초대 관장 황기,창무관의 2대 관장 이남석,송무관의 초대 관장 노병직 등 이른 바 관의 '원조'들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하였다.여기에다 한국 전쟁 후 만들어진 군대 도장 오도관의 초대 관장 최홍희와 역시 오도관 관장을 역임한 남태희도 포함된다. 한국 태권도의 뿌리들이 모두 미국에 옮겨져 있는 셈이다.' [한국무술 미대륙 정복하다/이 호성] 광복후 민간의 5대 문파에 이어 1954년 강원도 용대리에 국군 사상 처음으로 '오도관'이란 군 무도관이 창설되었다. 관장은 보병 제29사단 사단장이었던 최홍희씨와 사범은 남태희 중위였다.이 최홍희 관장은 '국기 태권도'라는 명칭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자 국군 태권도를 보급시켰고, 북한계 ITF 태권도를 설립한 인물로 초기 태권도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남한계 WTF태권도에서 최홍희씨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소외되는 이유는 그가 미국에서 반정부 활동을 한 경력과 친북 활동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오도관이 창설되었고, 그해 5월 용대리와 가까운 속초에서 제1군단 창설 기념식이 열렸다. 오도관 1.2기생 50여 명이 당수도 시범을 보인 것이 이날의 하이라이트였다. 무술을 매우 좋하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30분 동안의 시범을 줄곧 서서 관람했으며,특히 남태희가 기왓장 13장을 겹쳐 놓고 일격에 박살 내는 것을 보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박수를 쳤다고 한다. 시범이 끝나자 이승만은 최홍희를 돌아보며 "저게 예로부터 전해 오던 우리 태껸이야 태껸! 앞으로 전군에 보급시켜야겠어."했다. 이 한마디로 태권도라는 말을 확정시키고,미래의 태권도 발전에 전기가 된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 뒤 최홍희씨는 남태희와 함께 태권도라는 말을 만들어냈고, 이 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명칭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참석자는 손덕성 청도관 관장.이형근 합참 의장.조경규 국회 부의장.한창완 정치 신문사 사장등이었다. 이 위원회는 만장일치로 태권도라는 말을 승인했다. 그런데 조경규 국회 부의장이 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자고 제안하는 바람에 경무대에 회신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회신은 '태껸'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라는 것이었다. 그 후 2차 명칭 위원회가 소집되었고 몇달후 대통령이 친필로 '태권도'라는 휘호를 내림으로써 명칭은 확정되었다. 바로 이 날이 태권도의 탄생일로 '태권도의 날'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군대 태권도의 세력은 전쟁 이후의 안보 의식과 1960년대의 군사 정권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강성해졌다. 5.16전까지만 해도 태권도는 무도로 간주되어 경기 중심의 대회가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 국가 최고 회의 의장은 모든 경기 단체를 대한 체육회 산하에 들어가도록 조치했기 때문에, 태권도도 역시 대한 체육회에 가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1962년 민간 무도의 주류였던 5대 문파 관장과 군대의 오도관 관장이 모여 태권도 단체를 만들기로 하였다. 이미 자유당 정권때 최홍희의 주장으로 태권도란 말이 확정되어 있었으나 그때 그는 해외에 나가 있었고 상황이 이미 달라져 있어서 태수도 협회로 결정을 보았고, 이때 모인 관장들은 모두 7단으로 높였다.이 태수도 협회는 대한 공수도 협회.대한 태권도 협회(회장 최홍희)에 이어 세 번째로 조직된 무도 협회였다. 이처럼 태수도라 이름을 바꾼 배경에는 1950년대부터 시작된 민간 도장과 군 도장간의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대사로 가있던 최홍희씨가 다시 돌아와 태수도 협회를 맡으면서 다시 대한 태권도 협회로 바꾸었고 이 명칭은 두 번다시 변하지 않게 되었다. 최홍희에게 있어서 5.16은 악연이었다. 군실세로서 잘나가던 그가 해외로 나돌기 시작한 것도 박정희와의 불화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끊임없이 협회를 만들었고 태권도를 전파하는데 열성적이었다. 태권도 친선 사절단의 단장으로 유럽이나 중동을 돌고 온 그는 1966년 3월22일 태권도 협회가 구성된 9개국의 협회를 규합해 국제 태권도 연맹(ITF)를 만들었다. 그는 해외에 태권도를 더 널리 보급하기 위해 자주 여행을 했다. 1967년 그가 일본에 들렀을 때 ,일본 가라데계에 이름을 날리고 있던 최영의(교쿠신가라데의 창시자)를 만났다. 그가 일본 시민이 되기 위해 귀화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최영의를 만나 귀화를 포기하도록 설득했으며 고국에서 다시 만나 비밀리에 태권도와 가라데를 태권도로 통합시키자고 합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도복부터 통일하기로 하고 샘플까지 마련했는데, 귀국하기전 술자리에서 최홍희를 비판하는 모처의 의견을 듣고 심하게 동요한후 모든걸 백지화한채 일본으로 돌아가 귀화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 후 그는 1970년 최홍희는 태권도를 보급한다는 명분으로 오른팔인 남태희와 함께 24개국을 순방하며 해외를 떠돌았다. 이때 세계 각국에 태권도 협회를 만들었으며, 1972년 남태희와 함께 다시 32개국을 돌면서 귀국하지 않고 캐나다로 망명해 버린다. 1980년 그는 아들 중화와 15명의 시범단을 데리고 북한에 갔고 매년 한명씩 태권도 사범을 보낸다. 1983년 그는 다시 방북하였고 의형제였던 최덕신과 함께 다시 친북과 반정부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북한과 공산권국가들에게 태권도를 보급했으나 국내의 태권도 인들은 해외에서 반정부 발언을 서슴치 않으며 친북활동을 하는 그에게서 등을 돌린다. 그는 현재 아직도 캐나다 토론토에서 자칭 ITF총재로 태권도를 가르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태권도는 4.19이후 문교부가 주도한 통합 회의를 통해 대한 태수도 협회의 창설로 이어졌고 이것이 다시 대한 태권도 협회로 바뀌었다고 하였다.그러나 비록 혁명 정부의 문교부가 무도 통합을 시도했고 전국 체전에 참가하는 등 경기 단체로서 계파가 사라지는 것 처럼 보였으나, 계파는 존재했고 내부사정은 복잡했다. 그러던 것이 1967년 지도관의 이종우 관장이 계파 통합을 주도하면서 본격적으로 통합 논의가 다시 제기되었다. 그리고 1971년 이르러 현재 WTF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김운용씨가 대한 태권도협회 회장이 되면서 실질적 문파간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이윽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태권도에서 계파를 찾기가 힘들어졌으며 오늘날에 이르는 태권도의 모습이 갖추어 졌다.
맺으면서
태권도의 역사를 쭉 살펴보면서 다른 나라에 비해 태권도만큼 그 성장과 발전이 특이한 무술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그렇다. 가라데 유도 검도 아이기도를 살펴보아도 현대화된 일본무술은 여러 고대유파의 무술에서 근대에 이르러 그것을 탁월한 능력을 소유자였던 창시자가 체계화 발전시키는 순서이고 이것은 대부분 무술이 비슷하다. 그리고 창시자후에 제자들에 의해 관이 분열하거나 계파가 분리되기도 한다. 하지만 태권도의 발전 과정을 보면 그것은 창시자 개인이나 집단의 힘에서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전체에 의한 발전이라고 보여진다. 태권도에는 현재까지 누가 창시자다 라는 개념이 없고 분파도 없이 하나의 협회로 통일된이후 일사불란하게 성장하여 왔다.(ITF제외) 이런점은 태권도라는 무술이 국가적으로 통합되어 보다 빠르게 보급되고 대외적으로 성장하는 효과를 낳았지만, 반대로 국내적으로는 획일적이고 보편화된 모습으로 대중에게 흡수되어 태권도에 관해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런점은 국기(國技)이면서도 대중적으로도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무에타이와 비교되는 측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태권도의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면 국가적인 투기로 성장할 수 없었을테고 세계적인 수련인구와 올림픽 종목의 채택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태권도의 시작이 어떠하든 간에 태권도는 우리 민족과 시대와 토양에 의해 체계화된 우리 무술이다.그리고 무술에 뛰어난 재능을 갖춘 우리 무술인들이 발로 뛰어 세계에 널리 전파한 자랑스런 유산이며 뛰어난 무술이라고 하겠다. 그러기에 유도보다 50년, 가라데보다 20년,쿵푸보다 40년 늦게 건너간 미국에서 그 모두를 이기고 더 많은 무도 인구를 확보한 것이 아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