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먹지 않아도 되는 '비스트'
KTM 1290 슈퍼 듀크 R슈퍼 네이키드는 슈퍼스포츠 장르의 모델은 기반으로 보다 타기 쉽게 만들어지곤 한다. 덕분에 슈퍼스포츠만큼 강력하지만 또 그보다는 편안한 것도 사실. KTM이 만들어 낸 ‘괴물’은 어땠을까.
BEAST
EICMA 2012를 통해 공개되었던 슈퍼 듀크 R의 프로토타입
벌써 꽤 오래 전의 일이다. 2012년 11월 밀라노에서 열린 EICMA 2012에서 KTM이 1290 슈퍼 듀크 R의 프로토타입이 공개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시 발표된 바에 따르면 약 200마력을 달성할 것을 기대하게하는 말 그대로의 ‘괴물’로 소개됐다. 그로부터 또 1년 뒤 2013년 양산형 모델로 공개되면서 실체가 드러났다. 당시 스펙은 최고 177마력, 토크는 14.68kg-m로 최고 마력은 당초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지만 충분히 ‘괴물’같았다.
2016년까지 이어진 디자인은 이런 식이다
이후, 1290 슈퍼 듀크 R은 한 번의 모델 체인지를 거쳤다. 기존의 계기반 등이 바뀌고, 헤드라이트 등의 디자인을 현재의 듀크 시리즈 패밀리 룩을 따라 재정비했다. 사실은 이 모든 과정에서 딱히 1290 슈퍼 듀크 R에 큰 흥미를 가지진 못했다. 1300cc가 넘는 네이키드가 딱히 필요하지 않을 뿐더러, 강력한 네이키드의 필요성 자체에 의문을 가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KTM다운 그들의 매력 어필 방법도 마음에 전혀 들지 않았다. 가뜩이나 괴물같이 생겼는데 별명처럼 붙여진 수식이 ‘The Beast’라니. 울끈불끈한 근육질의 남자가 가뜩이나 눈빛까지 사나운데, ‘나 강함’이라고 쓰여있는 쫄티를 입고 다닌다고 생각해보라. 강해보이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딱히 친구로 삼고 싶은 생각은 없어지지 않을까.
2017년형 SUPER DUKE R은 현재의 듀크 시리즈의 패밀리 룩을 따른다
미안,
오해였다. 한남대교 북단 끝에 위치한 KTM 매장 앞에서 출발해 그 아래쪽의 도로로 합류하기 위한 약 50미터 남짓을 달리면서 나는 내가 뭔가 잘못 생각했다고 느꼈다. 1290 슈퍼 듀크 R에 처음 오르면서 느낀 것은 슈퍼스포츠 모터사이클에 가깝게 시트고가 높다는 점. 835mm의 시트고 자체는 리터급 슈퍼스포츠들의 시트고 들도 830mm 전후인 점을 고려하면 사실 꽤 높은 수준이긴 하다. 하지만 시트고는 단순히 높이가 아니다. 실제로 시트 위에 앉아보면 껑충 올라와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안정적이고 편안하다. 신호 대기 중에 발을 내려놓을 때에도 시트고는 딱히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1290 슈퍼 듀크 R은 긴 말이 필요없다, 올라타고 정말 조금만 달려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다
다리가 전혀 긴 편이 아니고, 허벅지도 두꺼워 발 착지성이 높을 이유가 없는 몸인데도 1290 슈퍼 듀크 R의 잘록한 허리에는 잘 맞았다. 배기량은 1301cc나 되지만 무척이나 콤팩트한 V형 2기통 엔진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KTM의 1290 시리즈들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이 엔진은 보어가 108mm, 스트로크는 71mm로 보어와 스트로크의 비율은 1.52:1 수준이다. 비슷한 배기량을 가진 두카티의 1299 파니갈레의 경우 1.9:1 수준으로 극단적인 숏 스트로크 엔진이지만, 1290은 그보다는 훨씬 여유있게 V 트윈 엔진 특유의 고동감을 충분히 여유있게 즐길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올라타고 거의 동시에 엔진의 질감이 참 좋다고 느꼈다. 스로틀을 열면 딱 그만큼, 그리고 스로틀을 여는 속도에 딱 맞게 출력이 튀어나왔다. 너무 민감하지도 않고, 또 무딘 부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부분은 전자식 스로틀 제어 시스템인 라이드 바이 와이어 방식을 사용하는 모델들 중에서도 특히 직관적이라고 느껴질만큼 만족스러웠다.
예각적인 디자인은 1290 슈퍼 듀크 R을 더 돋보이게 한다
본격적인 시승을 위해 시내를 벗어나는 시간은 약 오후 2시가 넘어서였다. 아무래도 교통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슈퍼 듀크 R을 충분히 테스트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덩치도 크고 출력도 높으니 시내에서 불편을 감수해야 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시내 주행에서 단점이 좀 드러날 수 있겠다고도 봤다. 하지만 이번에도 예상과는 달랐다. 장비 중량이 거의 200kg에 가까운데도, 시트고가 높은데도, 덩치가 작지도 않은데도 시내 교통 흐름에서 전혀 뒤쳐지지 않는다. 저속에서의 방향 전환성도 무척 편안하고, 충분히 강력한 엔진이지만 전혀 신경질적이지 않다. 물론 급격하게 스로틀 그립을 잡아비틀면 여지없이 프론트 서스펜션이 들썩거리지만,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시내를 벗어나기 전에 단점을 찾아보고자 했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제 막 시승을 시작하는 순간이었지만, 인정할 수 밖에. 선입견을 가지고 슈퍼 듀크 R에게 미안하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1290 슈퍼 듀크 R에 편견을 갖지 말자, 생각보다 편안하고 훨씬 타기 좋다
끝까지 간 슈퍼 네이키드는 이렇게 편하다
외곽 도로에 나서자 슈퍼 듀크 R은 한층 진가를 드러낸다. 탁월한 가속감은 라이더가 전혀 벅차게 느끼지 않으면서도 깜짝 놀랄만큼 빠르다. 리터급 혹은 오버리터급 슈퍼 네이키드들 중에서도 둘째 가라면 서운할 정도. 가장 흔한 직렬 4기통 엔진의 슈퍼 네이키드들이 회전수를 끌어올리면서 가속 토크를 끌어올려 쓰는 느낌이라면, 이쪽은 어디서나 펑펑 토크가 쏟아지는 느낌. 따라서 가속과 감속 그리고 재가속이 이어질 때의 쾌감이 있다.
꺼내고 싶은 만큼 토크를 꺼내 쓰면 그만
사실 일반적인 스피드에서라면 굳이 감속과 재가속 때, 기어를 변속할 필요도 없다. 그냥 스로틀을 되돌렸다가 가볍게 스냅을 주듯 비틀어 감으면 이미 앞을 가로막았던 차량을 등 뒤로 흘려버릴 수 있다. 하물며 기어를 변속하지 않아도 그런데, 옵션으로 제공되는 퀵 시프터의 도움까지 받는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베테랑 라이더라면 직접 회전수를 맞추는 변속 방법이 손에 익어있겠지만, 당신이 누구라도 이 퀵 시프터는 당신보다 충분히 빠를 것이다. 슬리퍼 클러치 역시 당연하다는 듯 포함되어 안정성을 더한다.
코너링 중 라인을 수정하는 것도 수월하다
코너링 성능에 있어서도 만족스러웠다. 일반 도로에서 제한된 수준으로만 즐겨보았지만, 슈퍼 듀크 R은 무척 안정적이다. 전체 무게가 62kg 정도 밖에 되지 않는 1300cc급 엔진은 날카롭고도 안정적인 코너링에 일조한다. 특히 1290 슈퍼 듀크 R의 엔진은 협각 75도로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협각 90도 V트윈 엔진에 비해 앞 뒤로 그 폭이 무척 좁다. 일반적인 V트윈 엔진이 좌우폭이 좁아서 코너링과 핸들링에서 장점을 발휘하는 것 이상으로 이 효과는 크게 느껴졌다. 또한, 엔진의 마운트를 보더라도 다른 V트윈 스포츠 모델과는 차이가 느껴진다. 두카티의 몬스터 1200을 예를 들면 엔진이 앞쪽으로 쏟아지는 듯한 모습에 가깝고, 1290 슈퍼 듀크 R은 거의 수평에 가까운 V형이다. 물론 두카티의 L형 트윈은 이와는 성격이 크게 다르지만, KTM이 선택한 엔진 마운트 방식은 질량을 중앙으로 집중해 보다 가벼운 핸들링을 연출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프론트 쪽으로 무게 중심을 배분한 쪽에 비해 안정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1290 슈퍼 듀크 R의 엔진은 협각 75도의 V형 2기통
코너링 라인을 머릿 속에서 그리고 차분히 그 라인을 밟아나가면 흐트러짐이 전혀 없을 뿐더러 당초 예상을 벗어났을 때에도 그것을 수정하는 것은 무척 쉽고 간단하다. 브레이크를 걸고 진입하던 과정에서나 완전히 브레이크에서 손을 떼고 스로틀 워크에 의존할 때나 마찬가지다. 또한, 코너를 탈출하면서 어느 정도의 토크를 쓸 것인지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행여나 토크를 과도하게 쓰려고 한다면 바이크의 기울기에 따라서 반응하는 트랙션 콘트롤 시스템이 지원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냥 스로틀 그립을 붙잡고, 토크를 꺼내보고, 부족하면 조금 더 꺼내쓰고, 그걸로도 부족하면 한 번 더 꺼내쓰면 된다. 말이 장황하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렇다. 풀 컬러 TFT 계기반이 일정 회전수 이상에서 붉은색으로 바뀌는데 그게 또 쾌감으로 연결된다. 정말 무진장 신나게 달릴 수 있다.
1290 슈퍼 듀크 R의 헤드라이트, 정말 매섭게 생겼다
선택의 기로
KTM의 1290 슈퍼 듀크 R은 슈퍼 네이키드 장르에 속한다
1290 슈퍼 듀크 R에 대해서 그리고 슈퍼 네이키드 장르에 속하는 모델들에 대해 생각해봤다. 오버 리터급에서는 아프릴리아의 투오노V4 1100 팩토리, 두카티의 몬스터 1200S 등을 꼽을 수 있고, 1리터급 모델들은 일본 브랜드를 포함해 BMW의 S 1000 R까지 포함할 수 있다. 하지만 1290 슈퍼 듀크 R과 비교한다면 아무래도 4기통 1000cc 미만의 차량들과는 좀 비교하기가 그렇다.
아프릴리아의 투오노 V4 1100, V형 4기통 엔진을 사용한다
상대적으로 가격도 차이가 크지만, 엔진 형식에서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 개인적으로는 1290 슈퍼 듀크 R의 엔진 필링도 나무랄데가 없지만, 더 자극적인 매력이 있는 투오노V4 1100의 편을 들고 싶다. 하지만 계기반 등이 구식인 점, 호불호가 크게 갈릴 수 밖에 없는 디자인 등이 마이너스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럼 두카티의 몬스터 1200S는 어떨까. 몬스터 1200S 역시 어이없을 정도로 편하게 즐길 수 있다. 최고 150마력 정도면 이전 세대의 슈퍼스포츠는 충분히 쫒을 수 있을 정도이고, 두카티의 개성이 옅어졌다고 평가되는 부분도 있지만 그 덕분에 훨씬 안정적으로 탈 수 있다. ‘BEAST’와 ‘MONSTER’는 둘 다 괴물이지만, 몬스터는 아무도 괴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패션성이 더 높게 평가받지만 기본기가 탄탄하다. 특히 몬스터 1200S의 판매가격은 2600만원, KTM의 1290 슈퍼 듀크 R의 2700만원과 비교하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경쟁 모델이다.
두카티의 몬스터 1200 S, 어이없을 정도로 빠르고 탄탄한 기본기를 갖췄다
하지만 아마도 각각의 모델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은 두 모델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지는 않을 것 같다. 누가 손해일까. 내 생각에는 KTM이 손해다. 1290 슈퍼 듀크 R을 염두하는 이들의 폭이 훨씬 좁기 때문이다. “최강의 슈퍼 네이키드를 갖고 싶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어필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극히 소수다. 그 소수 중에서도 실제로 1290 슈퍼 듀크 R을 구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보다도 훨씬 더 적지 않을까. 너무나 ‘강한’ 매력만을 내세운 이미지 때문에 1290 슈퍼 듀크 R은 경외시되는 것 만큼이나 먼 존재처럼 느껴질 수 있다. 시승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결코 1290 슈퍼 듀크 R이 겁을 내거나 별개의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거나 표현할 필요가 없었다. 매일 같이 타도 버겁지 않을만한, ‘슈퍼’이지만 ‘슈퍼마켓’ 갈 때도 탈 수 있는 슈퍼 네이키드가 바로 1290 슈퍼 듀크 R이다. 슈퍼카로 마트가는 것 같겠지만, 그게 또 맛 아니겠는가.
1290 슈퍼 듀크 R은 코너링에서도 정말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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